올여름 매미가 가장 처절했다
2016년 일기가 불러서 꺼내봤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소설 몇가지와 흐릿한 그림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고 옮겨적은 문장이나 하루하루의 기록들이 나름대로 치열했다.
생은 한바탕 망상이라는걸 적어놓았다가
다음날엔 부자가 되고싶다고 부들거렸다.
스물넷에는 아빠와 정말 많이 싸웠더라.
가출일기도 3일정도 찍혀있다.
가출해서 이상한 모텔에 들어갔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야한 신음소리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고민하다 이보다 조금 압권인 페이지가 있어 옮겨 적어본다.
타인의 입장, 관점. 존재 인식하기
저기 서 있는 사람의 수정체, 안구, 시야, 가족관계, 감각의 예민성, 발 크기, 신체 상태, 호불호. 이성관계. 성적 취향. 가치. 금전상태. 직업. 능력. 게으름 정도. 걸음걸이. 말투. 굳은살의 위치. 취미. 목소리. 머리카락 개수. 몸에서 나는 체취. 이빨의 개수. 발뒤꿈치에 대한 관점. 존경하는 선생님. 혐오하는 캐릭터. 비위 정도. 멀미 여부. 학창시절 트라우마. 학창시절 어떤 포지션의 학생이었는가. 식물을 좋아하는지. 벌레를 좋아하는지. 동물을 좋아하는지. 물고기는 먹는걸로만 정하는지, 아님 교감할 수 있는 존재라 여기는지. 달리는 행위에 대한 관점. 마른 체형에 관한 개인적 의견. 아이스크림은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가. 간식으로 어떤것을 먹는가. 소녀시대에서 누구를 좋아하는가. 플레이리스트엔 어떤 노래가 담겨있는가. 엄마에게 매를 맞은적. 아빠의 폭력을 목격한적. 동성애적 취향이 몇퍼센트정도인지.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한 색감의 청바지를 좋아하는지. 연청을 좋아하는지. 치마를 입어본적 있는지. 생리를 경험해본적 있거나 해볼 용의가 있는지. 외출하기 전 평소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이는지. 꼭 질러야만 하는 물건은 무엇인지. 집착하는 음식이 있다면. 눈을 자주 깜빡이는 편인지. 상대와 대화할 때 눈의 방향은 어디에 두는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무슨 변명을 하는지. 손팔에 털이 많은지 적은지. 사치스러운 생활. 여유로운 시간 등을 경험해본적 있는지. 꿈을 자주 꾸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자신을 모욕하는 낯선이를 발견했을 때 어떤 표정과 행동을 취하는지.가장 두려운 병은 무엇인지. 술을 좋아하는지. 마약을 할 수 있다면 시도해볼 것인지. 핸드폰으로 무엇을 보는지. 바람을 펴볼 생각이 있는지. 자신의 신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위는. 도려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은. 다시 태어나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자살을 위해 어디까지 해봤는지. 질투의 세기, 감각이 무감각한지, 아니면 무감각한척 하는건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자연재해, 흉악범, 가난, 질병 중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5년 후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스스로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 생각하는지.
-날짜는 적혀있지 않다.
지금도 고쳐야하는 습관인데 적을 때 날짜를 기입하지 않는다.
다음은 닥터스 하명희 작가에 대한 경탄이 이어지고 있어 아마 6월이나 7월쯤 됐을거다.
뭔가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등록하고 싶어서 그렸봤던 낙서도 나온다. 사람들을 만나고 와서는 이런걸 잔뜩 쏟아내기도 했다.
나는 넘어서야한다. 질투나는 누군가의 잘나가는 이야기들. 부글부글 끓어대는 열등감.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것만 같은 발밑의 현실감. 손에 닿지도 않는 꿈들. 내일 있는 피팅에 대한 스트레스. 턱밑살. 외모에 대한 불만족. 방의 후진 인테리어. 뻑뻑한 척추뼈와 어깨뼈. 다음 끼니에 대하여, 통장 잔고를 떠올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핫해지고 싶단 부단한 고민 또한 멈춰야한다. 지금 내가 내려야할 결단과 과제는 진로에 대한 고민뿐이다. 계획 또한 시급하다. 보다 심플하고 필수적인 것들로 일상을 채워야한다. 속이 까만 화염으로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초조한 마음뿐이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화가 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자 팔자 남자가 결정한다'는 지루한 신념이 너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얼굴 뜯어고치는데만 골몰한다. 꿈을 이루거나 노력하는 것 없이 요행만 바란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돼 있고 편한 것만 찾는 기회주의자라 불편해진다.
-하루살이에 대한 예찬론은 한참 뒤다.
예전엔 하루살이가 참 불쌍하다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루살이만큼 하루를 제대로 사는 존재는 없겠더라. 엄마에게 준 상처, 아빠에게 줬던 아픔. 그래서 애는 낳지 말아야겠다는 결론 같은거. 공연히 눈시울 붉어지는 가을밤. 초등학교 동창녀석들의 소식을 물으면서 어디서 비맞고 술먹지 않기를 바래보는거지.
-방송작가협회 수업을 들었던 날이 끝자락에 있다.
여의도역이다. 난 오늘 뭘 배울까. 국회도서관에 가려다 멈췄다. 그 시간에 쓰자. 왜 그렇게 에너지를 늘, 모두, 다 소진해버리고 싶었던걸까? 왜 새벽에 일어나야하고. 게을러지는 내 자신을 거부하고 싸우려들었던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 공허해지지 않기 위해. 허무와의 사투를 위해. 공허한 진실을 피하기 위해.
-스물여섯. 한발짝이라도 나아갔을까나
소주먹고 돌아오는 길.
어둠속 버려진 매미를 밟고 발끝으로 느껴지는 그 찌르르한 감촉에 온몸을 떨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