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마지막 4개월

이별의 그림자

by 역마자

본사에서 갑작스러운 복귀 명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왔다. 코로나로 인해 중국 사업이 축소되어 내가 맡고 있던 Project도 더이상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언젠가는 복귀 명령이 있을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빠른 명령에 혼란스러웠다.

본사에 Project를 마무리하기위해서는 최소 1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중국 사업의 현실을 숫자로 반박하는 본사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였다. 4개월후 나는 떠나야 했다.


“4개월후에 복귀해야할것 같아.”


그녀에게 그 말을 꺼냈을 때, 샤샤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도 이런 날이 올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체념하는 듯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이전처럼 감정적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단단하고 고요하게 말했다.

“그럼 이사할게. 당신 집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제안은 예상한 바였고, 어쩌면 나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별을 정리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샤샤는 ‘끝’이라는 단어 대신 ‘함께하는 마지막’을 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내 작은 아파트. 평소엔 혼자 지내기에도 좁다고 느껴졌던 공간이 이제 둘의 온기로 가득 찼다. 아침엔 샤샤가 먼저 일어나 창문을 열고 공기를 갈아주었고, 커피 머신이 윙 하고 돌아가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자주 내 낡은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주방에 서서 프렌치토스트를 굽는 내게 다가와 등을 감싸 안으며 “당신 냄새 좋아”라고 말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식사하고, 음악을 듣고, 술을 마셨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말들을 천천히 꺼내놓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상하이라는 도시의 의미, 그리고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매달리게 되었는지를.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몸살 기운을 느꼈다. 열이 오르고 목이 붓고 기침이 심해졌다. 코로나였다.


나는 회사에 재택을 신청하고 그녀 곁을 지켰다. 해열제를 챙기고, 뜨거운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며 밤새 곁에 있었다. 그녀는 몸이 힘들면서도 끊임없이 내 손을 잡으려 했다. 한순간도 놓지 않으려는 듯한 손길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기대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꼭 쥐는 것 말고는.


며칠 후 그녀의 증세가 나아졌을 즈음, 이번엔 내가 쓰러졌다. 고열과 두통, 몸살에 시달렸다. 이번엔 그녀가 나를 간호했다.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고, 죽을 끓이고, 내 잠꼬대에 놀라 새벽에도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당신을 간호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아플 때라도 곁에 있을 수 있어서.”


그 말이 유독 아프게 다가왔다. 사랑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한 사람의 헌신과 절망이 섞여 있는 형태로 남는구나 싶었다.


나는 이별이란 게 단순히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라는 걸 점점 깨달았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함께 보내며 조금씩 작별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며 천천히 불을 끄는 일처럼.


어느 날 밤, 와인을 마시다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 한국 가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마도.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아닐 거야.”


“무슨 말이야?”


“이렇게 내 전부를 쏟아붓는 사랑은… 다시는 못할 것 같아.”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잔을 비웠다.


마지막 밤, 우리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를 껴안고, 익숙한 음악을 틀어 놓고, 창밖에 흐르는 상하이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이미 익숙했던 도시였지만, 그날은 낯설 정도로 아름다웠다. 끝이라는 걸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처음처럼 보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고마웠어. 너와 보낸 이 시간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당신 때문에… 내 인생에 후회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었어.”


잠든 그녀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마저 정리했다. 여권, 티켓, 메모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길 편지를 봉투에 담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와 함께한 상하이는 나에게 두 번째 인생이었어. 고맙고, 미안하고, 또 고마워.

아마 언젠가, 이 도시에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땐 너 없이도 괜찮기를 바라.

하지만… 영원히 잊지는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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