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배우 김영선의 따뜻한 시선
며칠 전 유투브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찮게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의 동영상 썸네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며칠 전 부터 알고리즘님?의 추천으로 몇 차례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예능 영상을 잘 보지 않는터라 클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도 추천을 해대니^^ 어떤 영상인지 궁금해 click!
중견 배우로 보이는 여배우인데, 처음보는 얼굴이라 "누구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유재석씨와 조세호씨의 가운데 자리에 김영선 배우라는 분이 게스트로 앉아 있었습니다.
유재석씨와 조세호씨는 김영선씨가 배우로서 감정표현과 이입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칭찬하며 자신들(개그맨)은 직업상 눈물을 흘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유재석씨는 김영선 배우에게 혹시 이 자리에서 눈물 연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고, 당연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조세호씨가 울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이때 부터 영상에 흥미를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 스스로 눈물 연기 하는 것은 몇번 본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이 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니? 과연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7PfW-L4_x8&t=185s
김영선 배우는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세호씨! 지금부터는 상황과 관계 없이 제 눈만 봐 주세요. 저한테만 집중해주세요. 제가 뭐라고 하는지 제 마음을 읽어 주세요."
김영선 배우는 조세호씨를 바라보았습니다. 두 눈을 고정하고, 마주 선 조세호씨를 바라 보았습니다.
5초, 10초, 30초, 1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통 예능 프로그램의 카메라는 한 장면을 3초 이상 잡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세호씨를 바라보는 김영선 배우의 말없는 시선은, 1분 동안이나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눈빛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은
"조세호씨 많이 힘들죠? 당신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다 알아요. 잘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할거에요. 정말 고마워요." 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영선 배우의 시선 앞에서 조세호씨는 30초 만 폭풍 눈물을 흘렸습니다.
뭐랄까요...
저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의 성스러움'을 경험했습니다.
그저 바라봄으로 타인의 존재를 회복시키는 시선의 놀라운 능력이 무엇일까요?
사르트르는 그의 책 '존재와 무'에서 인간의 시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르트르 철학의 제1 주제는 '자유'입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왜 자유를 갈망할까요?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은 아직은 자유롭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경제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이 억압을 받는 것은 브루주아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이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구속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은 신과 단절을 선택했습니다. 신을 인정하고는 스스로 신의 위치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과의 단절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인간과의 단절 상황을 초래합니다. 단절된 인간은 소통할 수 없게 되어 상호 굴복시키는 투쟁의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니체는 이성중심의 사고가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총체성을 억압하였으며, 이를 해방시켜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에 주목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이란, 좁은 의미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시선'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간 존재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설명했습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어떤 시선아래 놓여 있는가?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3부에서 타자론을 전개합니다.
그는 '의식'의 유무를 기준으로 모든 존재를 '인간 존재'와 '사물 존재'로 구분합니다.
인간존재를 '대자존재'라 부르고, 사물 존재를 '즉자존재'라 부릅니다.
대자존재란,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존재의 가장 중요하고도 큰 특징이 자기 자신을 마주함 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경험합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죠.
반면, 즉자존재는 대자존재의 '자의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즉자존재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대자존재에 의해서만 그 존재성이 부여될 수 있습니다.
대자존재는 다시 '나'와 '타인'으로 구분됩니다. 나를 '대자존재'로 타인을 '대타존재'라 부릅니다.
여러 개념들이 나오니 어렵죠? ^^
이번 글에서는 사르트르의 모든 개념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시선'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시선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를 해보면.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대자존재'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존재는 '즉자존재'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대타존재'
엘리베이터를 타보신 적이 있으시죠?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타게 되면 어떤 경험을 하시게 되나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상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엘리베이터의 양 끝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정리하기 위해서 돌아서거나 딴 곳을 응시하죠.
만약 그 사람이 나를 뚫어지도록 쳐다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시선에서 우리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소위 '동네 형들'은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시비를 걸 정도로 본다는 것은 '힘'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시선이 힘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보는 것 뿐인데, 굳이 '힘'이라고까지 표현해야 할까요?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라는 작품은 지옥에 간 네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가르생, 이네스, 에스텔, 급사
에스텔은 죽음 후에 급사의 안내를 받아 지옥의 한 방으로 안내됩니다. 그 방안에는 처음보는 두 사람이 이미 와 있었습니다. 에스텔은 자리에 앉아 자신들이 상상했던 지옥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놀라며 사뭇 좋아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안도 잠시 뿐입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이 방은 '출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그 곳에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가르생: 나를 잡아먹을 듯한 이 시선들...아! 당신들은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고챙이...아! 웃기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한 방안에서 서로의 시선에 노출 된 채 피할 곳이 없는 그들은 '타인의 시선이 지옥'이라 여기게 됩니다.
증오의 시선, 미움의 시선, 격멸이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한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음을 작품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선은 바로 이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j3AHMInics
인간은 자신이 주체로 서기 위해(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 타인을 '즉자존재'로 전락시키려 합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모두를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응시하는 것이고, 어떤 존재로부터도 응시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모든 것을 응시하고자 하는 욕망(신적 욕망)이 있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권력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를 조망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왕궁은 늘 높은 곳에 위치합니다.
사르트르는 그의 작품 에로스트라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나는 불을 끄고, 창가에 몸을 기댔다. 그들은 위로부터 자신이 관찰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모습이나 때로는 뒷모습을 정성스레 치장한다. 하지만 그 모든 효과는 1미터 70센티미터짜리의 구경꿈을 위해 계산된 것이다. 도대체 누가 7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중절모자의 모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겠는가? 그들은 짙은 색과 화려한 천으로 그들의 어깨와 머리를 보호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 인간의 커다란 적인 굽어보는 전망과 맞서 싸울 줄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서기를 바라고, 그 시선을 통해 타인을 제압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시선에 제압되어 버리면, 나의 삶은 어느새 지옥이 되어 버리고, 나의 정체성은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고정되어 버리니다.
저는 인간 존재와 시선에 대한 사르트르의 분석에 동의를 합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보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연구하면 사르트르에게 격하게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상에서도 그렇습니다. 며칠 전부터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을 의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는 부모님이 나를 과도한 기대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나도 모르게 그 시선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타인의 시선은 각자의 삶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언제나 미움, 증오, 혐오의 눈빛으로만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유퀴즈에 김영선 배우는 그의 시선에 위로를 담았습니다. 프로그램 안에서는 그것이 연기처럼 보여졌지만, 그녀는 마음의 진심을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세호씨를 향한 자신 안에 있는 따뜻한 마음에 집중하며, 자신의 시선에 그 마음을 담았기에 그 마음이 전달된 것입니다.
저는 '시선은 중립적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그 시선 안에 무엇을 담을지가 문제이지 않을까요?
나는 가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까?
나는 동료를 신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까?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선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나 또한 그러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관한 읽어볼 만한 글
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74602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09409#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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