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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Aug 30. 2021

정의는 강자의 편익인가?

플라톤 '국가' 제 1권

유전무죄 무전유죄

88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88년 10월 8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25명중 12명이 탈출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5명이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있는 가정집으로 들어가 인질극을 벌이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iZ_VksWvdE

5명 중 4명이 사망하고, 1명만이 살아남은 비극의 탈주와 인질극은 왜 벌어진 것일까요?


"탈주범 지강헌이 '무전유죄'와 짝을 지어 참담한 사법 현실을 풍자한 표현 '유전무죄'의 장본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었다. 젼경환은 76억원을 횡령한 협의로 징역 7년(3년 정도 복역 뒤 출소)을 선고받았는데, 지강헌은 556만원을 훔친 죄로 징역 7년에 추가로 보호감호 10년 처분을 받았다. 도무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절규가 나올 법했다." 1)  

전경환(좌)과 지강헌(우)

"대법원이 2004년 1월 M&C 리서치를 통해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형사재판이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 지위가 높거나 낮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66.5%는 '그렇지 않다', 18.2%는 '매우 그렇지 않다'고 답변해서 83.7%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또 2017년 1월 동아일보-엠브레인이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은 유전무죄,무전유죄가 얼마나 적용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가 19.6%, '매우 그렇다'가 71.4%로 총 91%의 답변자가 유전무죄,무전유죄에 대한 강한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유전무죄·무전유죄는 우리 국민의 인식을 넘어 현실에도 존재하는 것일까요?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수감 중 재판을 받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월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석방된 바 있는데, 이때 화제가 된 것이 소위 ‘3·5의 법칙’이었습니다. 이 법칙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가리키는데, 현행법상 징역형이 3년 이하일 때만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여, 법원이 재벌 등 특권층에 억지로 징역형을 3년 이하로 선고하고 이와 함께 집행을 유예해서 석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비꼬는 조어입니다. 이재용 부회장 외에도 그간 1조5천억원대 회계분식 혐의의 에스케이(SK)그룹 최태원 회장, 1천억원대의 비자금 조성 혐의의 현대차 정몽구 회장, 1500억원대의 배임과 400억원대의 탈세 혐의의 삼성그룹 이건회 회장 등이 모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바 있습니다." 2)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사법적 측면의 차별은 미국에서도 큰 사회문제이고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애덤 루니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니컬러스 터너는 미국 30대 수감자들과 부모 소득 사이의 관계를 상세하게 추적하였습니다.

(‘수감 전후의 노동과 기회’, <브루킹스연구소 보고서>, 2018) (그림3)에서 보시면 남성과 여성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 부유층 출신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성의 경우 부모의 소득이 하위 10%인 경우 수감되는 비율은 상위 10%에 비해 대략 스무배 정도 높았습니다.(이러한 연구가 가능하도록, 미국 재무부, 국세청, 교정당국이 관련 데이터를 제공한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우리가 본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림 3

우리나라 사법체계는 전반적으로 건강하고,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겨레 신문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개선해야 할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기도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빅토를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굶주리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19세기의 처참한 민중의 삶을 배경으로 합니다.

파리 거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에 못지 않게 좀도둑도 많았습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빵을 훔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중형을 내리고, 각종 부정부패를 일으키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는 무엇입니까?


권력의 유착 (박수환 로비사건)

2016년 8월 뉴스컴(홍보 대행사)의 박수환 대표가 구속되었습니다. 박수환 대표는 권력을 가진 인맥을 활용하여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는 과정에서 법을 위반하였습니다. 특별히 언론과 기업이 유착하도록 하고, 돈을 받고 기사 쓰고, 자녀를 대기업의 취업시키는 등 사회의 공정성을 심히 훼손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cvY9UMA7cY

언론의 생명은 공정성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힘의 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정의를 수호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마주하는 국민들이 과연 언론의 공정성을 믿을 수 있을까요?

결국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소크라테스의 죽음

당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동맹 사이의 전쟁) 이후에 쇄락의 길을 가고 있었으며, 권력자들은 공공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패를 저지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위기 가운데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 깨워 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옮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움직임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성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기소하였습니다.


플라톤의 단편 <크리톤>에는 소크라테스의 친구 크리톤이 돈을 이용해서 소크라테스를 감옥에서 빼내려고 합니다.


"그런 염려라면 하지 말게. 자네를 구출해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겠다는 사람들에게는 큰돈을 주지 않아도 되니까. 게다가 자내도 알다시피, 밀고자들은 값이 싸서 그들과 거래하는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네. 자네를 위해 나는 돈을 댈테고, 내돈이면 아마 충분할 걸세. 하지만 만약 자네가 나를 염려하여 내 돈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곳을 방문한 외지인 중에 돈을 대겠다는 자들이 몇 명 있네. 그중 한 명은 실제로 이 목적에 쓰려고 돈을 충분히 가져왔다네. 테바이 사람 심미아스 말일세. 케베스와 그 밖의 꽤 많은 사람도 돈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네."4)


소크라테스가 살던 고대 아테네에도 법이라는 것이 강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만, 형벌이 주어졌을 때 정의롭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크루이 다비드 / 1787년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크라테스는 불의한 법이라도 그것을 지킴으로서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다

플라톤의 <국가> 제 1권에는 케팔로스 옹의 집에서 소피스트인 트라쉬마코스와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둘의 첫번째 주제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 옹에게 '재산이 많아서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케팔로스 옹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아서 좋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빚을 지지 않는 삶이 옳은 삶'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케팔로스 옹은 잘 모르겠다면 자리를 떠납니다.

그 이후에 트라쉬마코스가 나서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의견에 대해서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의술'은 의술 자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의술이 필요한 사람으 위한 것인지 묻습니다. 만약 의술이 의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정치도 하나의 기술이라고 본다면 정치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트라쉬마코스는 당시 아테네의 정치상황 속에서 정치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곡된 현실에서 시작하여 왜곡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왜곡된 현실이 아닌, 원형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합니다.

정의의 여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의가 강자의 이익'인 것 처럼 보이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잡게 될 때 우리 사회는 희망을 상실하게 됩니다. 절대로 왜곡된 현실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원형을 떠올리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1) 김영배 기자, 한겨레 신문

2), 3) 신현호 테이터 분석가, 한겨레 신문

4) 플라톤, <크리톤> 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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