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 대하여
음악계에서의 표절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존경받는 뮤지션 유희열 씨의 음악이 표절논란에 휩싸이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유튜브에 '유희열 표절'이라고 치면 원곡과 표절이 의심되는 유희열 씨의 노래를 비교해놓은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음악을 좋아해서 많이 듣는 편인데, 비교해 놓은 두 곡이 정말로 똑같다고 말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유희열 씨를 옹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마추어 감상자 입장에서 원곡과 표절 의심곡의 멜로디나 진행방식이 유사하기는 한데 곡 전체가 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오히려 '재 창조'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해당 곡들이 표절인지 아닌지는 현재 논란이 있으니 판단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점점 더 표절에 대한 부담감은 커질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전 세계 모든 노래를 다 들을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과거와는 다릅니다. 표절과 관련해서는 '창작과 검증'의 영역이 있는데, 표절은 창조의 영역에서 나올 수도 있고, 검증의 영역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무의식 표절'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절은 '창작' 단계에서는 표절이 아니지만, '검증' 단계에서 표절이 됩니다. 과거 온라인 음악 시장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나라의 경우 그저 영미 팝이나, 일본 노래 정도만이 '표절 검증'의 데이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데이터가 전 세계 모든 음악으로 확장되어, 뮤지션들의 어려움은 더 커진 듯합니다.
저는 표절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조금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표절 여부를 작곡자 개인에게 의존하거나, 법적인 문제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표절에 대해서 자유로운 뮤지션은 없으며, 표절이 의심되면 사후 검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재조정이 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녀사냥 하듯 흥분된 분위기가 아닌 좀 더 관용적이고, 차분한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절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도 조금씩 다릅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논란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는 것 같아 괜히 보태고 싶지 않았지만, 인터넷을 떠도는 표절 의혹에 공감하지 않는다"면서 "코드 진행 일부가 겹친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 원곡자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면 모를까, 찰나의 음표 진행 몇 개가 겹치는 것도 표절이 되지 않는다. 높낮이와 속도를 조정해서 비슷하게 들리는 곳 또한 마찬가지다. 내 귀에 비슷하게 들린다고, 내 기분이 나쁘다고 표절이 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냈다.
(출처: https://www.mk.co.kr/star/musics/view/2022/07/642123/)
김태원은 지난 5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논란이 제기된 곡을 들어봤는데, 한 8마디 정도가 똑같았다. 그 점이 아이러니하다. 보통 표절을 한다면 멜로디를 한두 마디 변형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표절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거다”라고 말했다.
(출처: joongang.co.kr/article/25084759#home)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1915-1980)'저작권'에 대해서 부정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바르트는 작품의 기원에 '저자'가 있고 그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이야기 하나 영상, 그림, 음악을 '매개'로 독자나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도식을 부정했습니다."
(출처: 아치다 다츠루,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그는 저자의 저작물은 저자의 순수한 경험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한 저자는 한 시대 안에 존재합니다. 저자가 살아가는 시대와 공간은 진공상태가 아니고,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수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시공간입니다. 저자는 그러한 시공간에서 경험하고, 생각합니다. 또한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하나의 구조입니다. 어떤 언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는 무의식적으로 주어질 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어법의 진리 속에서, 즉 그 지역성 속에 붙들려 있다. 나의 어법과 이웃 사람의 어법 사이에는 격렬한 경쟁관계가 있고 우리는 그곳으로 끌려 들어간다. 왜냐하면 모든 어법은 패권을 다투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출처: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바르트는 특정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지역성에 붙들린다고 했습니다. 반복하자면, 한 저자가 어떠한 언어를 사용할 때 이미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내용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어떠한 창작물을 완료하기도 전에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이 포함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어떤 음악을 창작하는 데 있어서 한 시대가 가지고 있는 축적된 결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법적인 의미에서의 '저작권'이라는 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순수 창작'과는 다릅니다.
다만, '저작권'을 바라볼 때 '완벽한 순수'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것과 차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소쉬르는 '언어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랑그'로 통칭했습니다. 이는 특정 언어가 담고 있는 '문법'입니다. 이 문법은 단지 말하는 법을 넘어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정신문화 전반을 의미합니다. 랑그는 자신만의 문법으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을 제한합니다.
바르트는 이 보이지 않는 문법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랑그(langue)와 스틸(style)입니다.
랑그는 소쉬르가 설명한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랑그는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입니다.
스틸은 영어로 스타일로 읽힙니다. 이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적 감수성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개인의 스타일입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선호에 따라 각자의 문제가 형성됩니다.
랑그는 외부, 스틸은 내부라는 두 종류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 우리의 언어 사용을 규제합니다.
그렇다면 '에크리튀르'는 무엇일까요? 이는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하는 순간 그 전체 체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규제를 말합니다. 다른 글에서 우리 학교(꿈의 학교)는 존대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한다고 말했습니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에 존대어를 사용하도록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대어라는 것이 '존중감'을 높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거리감'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과 학생 사이보다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편합니다. 그럼에도 친근함을 표시해야 하는 경우 '평어'를 쓰게 됩니다.
우리는 존대어를 선택할 수도 있고, 평어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 어느 쪽을 선택하는 순간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구조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대들의 말투가 있습니다. 어른인 저도 십대의 말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십대의 말투를 사용해서 학생들과 즐겁게 지낼 수는 있지만, 수업을 십대의 말투로 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어휘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말투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의 말투를 쓰는 순간 절도 또는 경직성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에크르튀르'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적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저역적인 언어 사용'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어떤 어법을 선택한 순간 자기가 선택한 어법이 강요하는 '형태'로 말하게 됩니다. 에크르튀르는 우리의 삶을 통제합니다.
정확히 어떤 영화인지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1000만 영화인데요.
어느 날 라디오를 듣는데, 1000만 영화감독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내용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영화가 1000만 관객에게 보이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은 제 영화가 아닙니다. 저도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 영화를 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지점에서는 감독의 의도가 가장 중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영화가 상영되고 많은 사람이 보게 되면 감독의 의도보다 '해석'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 해석은 감독의 의도와 일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3의 의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감독도 자신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해석'을 통해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직물을 그 뒤에 다소간의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의 산물, 완결된 베일로 간주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직물에서 짜임을 통해 텍스트가 만들어지며 작업되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직물,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내며 점점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은 자신을 해체한다. 우리가 신어 사용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론을 거미학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저자는 자신의 텍스트를 직조하지만, 그 시줄과 날줄에는 이미 수많은 정보(랑그, 에크르튀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이미 형성된 스틸 안에서 직조하게 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텍스트의 주인은 누구인가?
정말 저자 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직조하고 있는지 100% 알 수 없다면, 그 숨겨진 의미는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출처: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저는 인터넷에 달린 댓글을 잘 안 보는데, 바르트를 공부하면서 댓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텍스트가 공개되는 순간, 그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읽힙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해석되어 반응하게 되죠. 같은 텍스트를 접하더라도 반응은 다릅니다. 그러한 반응이 댓글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댓글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고, 저자의 의도가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