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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Aug 31. 2022

우월한 문화는 없다_레비스트로스

현대철학의 개념들

늑대와 춤을 (1991)

1991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3시간이나 되는 느린 템포의 영화가 당시 내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대작이라고만 알고 그렇게 흘려보냈습니다. 20여년이 지나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딱히 볼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스쳐지나듯 보고 있다가, 3시간 내내 몰입하며 정주행을 했습니다. 

1963년 미군 장교 존던바는 전쟁의 광기에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총성과 부상, 피 흘림과 절규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데, 점점 더 전쟁의 명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적군과 아군 사이를 달렸습니다.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내달렸고, 이상하게도 그의 행동은 아군의 사기를 올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쟁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터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깊은 시골, 인디언들이 사는 구역으로 전출 신청을 하고 치열한 전장을 떠났습니다. 수우족 인디언들이 사는 지역에 홀로 막사를 지키고 살았습니다. 아무도 없이 홀로 고독한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을 때쯤 한 인디언 여인의 목숨을 구해준 계기로 수우족과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호기심으로 바뀌게 되고, 그들과 만남을 가질 수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존엄함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인디언들은 미군을 죽인 후 머리 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적절한 의복을 갖추지도 않은 채 살아가고, 미신을 믿고 있습니다. 근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문화는 계몽되지 않은 상태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부에는 나름대로의 문화가 존재합니다. 

부족의 위기 앞에 모두가 둘러 앉아 의견을 나누고, 결정을 합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버팔로를 사냥할 때도 필요한 만큼만 존중의 마음으로 사냥을 합니다. 

존 던바는 이러한 수오족의 삶의 방식이 더 인간답다고 느꼈습니다.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빼앗고, 죽이는 자신들의 모습보다 가족을 보호하고, 필요한 만큼만 취하며, 자연에 대한 감사를 가지고 있는 인디언의 삶의 방식이 더 나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존 던바에서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고 받아들이고, 수오족의 일원이 됩니다. 


소셜 믹스 (Social Mix)

잊을만 하면 나오는 뉴스 중 하나가 임대 아파트 주민과 분양 아파트 주민 간에 갈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임대아파트와 같은 학군이 되는 것에 대한 반대,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분양아파트 학군 학교로 오는 것에 대한 반대, 임대아파트 주민들에게는 주차 공간도 내줄 수 없다는 주장들이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소셜믹스라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짓는 것인데, 1894년 영국 버밍엄의 본빌(Boruneville)에서 처음 시작된 정책입니다. 

하지만 소셜 믹스 정책도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양 아파트 주민들에 의해서 다양한 방식의 차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 자신은 더 나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도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다양한 종류의 계급적 상징체계를 은근히 즐기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갤럭시 스마트폰을 사용했는데, 아이폰으로 넘어온 이후로 알 수 없는 싸구려 우월의식이 슬그머니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느꼈습니다. 그뿐 인가요? 

반대 경험도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차 이전에 소형 세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년 정도 탔고, 아이 셋을 키웠습니다. 한번은 지인 결혼식이 있어서 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결혼식장 앞에 발렛파킹 직원들 여럿이 나와 주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사한 결혼식장 앞에 낡은 소형 세단을 세우고 다섯식구가 내리는데, 의도하지 않았던 부끄러움이 내 안에서 밀려나왔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상징 체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정해지지 않습니다. 단언코! 

헨리 나우엔이라고 하는 하버드 교수가 경쟁적이고, 발전지향적인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라르쉬'라는 지적 장애인 공동체에서 남은 생을 보낼 결심을 했습니다. 공동체에 도착한 첫날 헨리 나우엔은 자신을 하버드 대학 교수였고, 저자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질문은 하버드가 무엇이고, 교수는 무엇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지적 장애인들에게 하버드가 무엇이고, 교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만 되돌아 올 뿐 도저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날 일기장에 "오늘 나는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내 삶에 변화가 시작될 것 같다."라고 적었습니다. 

사회적 상징체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그들은 헨리 나우엔의 소개를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왜 라르쉬에 왔는지, 그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소셜 믹스가 정책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는 우월감이 있고, 우월감은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싶은 '탐욕'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낫고 싶다는 변명으로 본질을 피해나갈 수는 없습니다. 

'지배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게 돈이 됐든, 지위가 됐든, 지식이 됐든, 외모가 됐든, 배경이 됐든 본질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싶은 것이 '우월감'의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슬픈 열대>, 레비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는 190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프랑스로 옮긴 후 젊은 시절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철학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문화인류학으로 커리어를 바뀌게 됩니다. 

1935년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연구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는 <슬픈 열대>를 통해서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소개하며, 당시 서양사람들의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틀렸음을 주장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사회가 세계의 다른 나머지 부분에 대해 그 자체의 기준을 부여하려는 오만하고도 잘못된 전통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는 이들 원주민 사회가 야만적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반박하며, 이른바 미개사회는 인간성에 관한 전체적 체험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사회는 오직 우리들의 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에는 더 우월한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서구사회가 기술적으로는 이들 원주민 미개사회보다 더 우월할지 모르나, 그것이 정신적인 면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우월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무뿌리나 거미 또는 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들 자신의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회조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구 사회의 폭군적 습관과 서구인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경멸하는 것은, 서구사회 그 자체가 하나의 부족적인 편견 또는 '민족적 우월감의 사상'(ethnocentrisme)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출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_박올줄(서울대 명예교수)


그는 인간 정신의 기본 구조는 동일하며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문화의 다른양상이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현재 서구인들의 사회처럼 진보적이며, 발명과 업적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과열된 혹은 동적 사회'라고 부르며, 종합의 재능과 인간적 교환의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냉각된 혹은 정적 사회'라고 부른다. 냉각된 사회는 기술적 진보에서 하나의 척도가 되는 개인당 에너지의 양을 거의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계적이다. 이 사회는 원초적 상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고, 또 기록된 전통이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이 사회들은 매우 민주적이며, 거기에는 위계의 서열에 의한 인간적 파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한편 '과열된 사회'는 열역할적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하나의 스팀엔진처럼 에너지를 산출하고 소비하면서 갈등을 통해 발전하여왔고, 기술적 비약을 이룩해왔다." 

출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_박올줄(서울대 명예교수)


레비스트로스는 서양 문명과 타 문명은 다른 의미와 목적을 추구했으며,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의 특징적인 문화를 구축했다고 말합니다. 서양 사회는 과열된 사회로서 역동성과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선택에 따른 관계의 단절과 비인간화를 낳았으며, 원주민 문명은 정적인 사회로서 공동체성을 유지한 반면 여전히 낮은 생산성과 자연재해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이러한 점을 대입해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역동적이고, 과열된 아이들도 존재하며, 정적인 아이들도 존재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이 두 부류로 나누어지지는 않습니다만, 어쨓든 이 두 부류의 아이들은 우열과 상관없이 각자의 독특함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고,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사회? 더 열등한 사회란 정말 없는걸까?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발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걸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문제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점점 더 개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문제는 본질적으로는 '억압'에 관한 것입니다.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을 2가지 경우로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연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의 자연은 우리가 마주하는 경치와는 다른 것으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자연법칙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살아가야 합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뛰고 있고,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자연으로부터 음식을 얻는 것은 수고로운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창3:17, 새번역]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그 수고가 인간에게 고통이 되고, 억압이 됩니다. 정복자들은 스스로 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타인을 노예로 만들어 스스로는 수고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자연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4차 산업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우리는 로봇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통치 권력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입니다. 왕, 귀족, 황제 등 수 많은 권력들이 인간의 자유를 통제해왔습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 위계라는 것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권력이 독점되는 현상은 언제나 그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역사는 통치 권력으로부터의 억압을 '민주정치'라는 제도를 통해서 해결하였습니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아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나은 제도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과학기술과 민주제도는 서양인들에게 물질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주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측면에서 '발전'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했던 지점은 서양인들의 문화가 원주민의 문화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지는 않다는 것이라면 더 쉽게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이성중심의 서양의 역사도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원주민의 문화가 모든 면에서 더 나은 것도 아닙니다.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바라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 개인적으로는 문화의 우열은 분명히 존재하고, 더 나은 문화, 더 나은 역사로의 지향점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우월감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해서 우월감을 갖거나 다른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좋은 것이 있다면 전해야 하고,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우월감은 타인과 연결하지 않은 채 자기를 과시하는 태도로 정신적으로 열등한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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