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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l 11. 2021

내면의 삶을 저평가 하는 문화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파커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를 읽다가, 우리 사회가 내면적인 삶을 저평가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을 하나 이야기하라면 '모든 권위에 의심을 갖는 문화'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의심'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우리는 잘못된 권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파괴적 삶을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이러한 파괴적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겁니다. 


최근 김누리 교수라는 분도 독일 교육의 핵심을 이야기하면서, 독일 사회가 비판적 사고를 얼마나 중시 여기는지 강조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비판적 사고라는 것이 간단히 말하면, '의심하여 생각하도록'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권위를 부여받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종교권력'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입니다. 

 아래는 다비드가 1805-07년까지 그린 '대관식'이라는 작품입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요.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7세가 나폴레옹 1세에게 황제로 임명하고 난 후 자신의 아내 조세핀에 직접 황비의 관을 씌어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당시 종교권력이 이미 쇠퇴하여 교황이 아닌 황제인 나폴레옹이 아내를 황비로 임명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는 했으나, 그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권위는 더 높은 권위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데, 모든 권위의 최종적 권위는 '신적 권위'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8 혁명의 슬로건과 함께 부정적이고, 잘못된 권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혁명적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권위자들에게 복종한 대가가 참혹한 전쟁뿐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후 모든 권위에 대한 의심이 현대적 미덕이 되었으며, 이 흐름의 중심에는 '신적 권위'에 대한 거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신적 권위'에 대한 거부감은 조금 더 확장되어 '보이지 않는 세계와 가치'에 대한 거부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실증주의'와 같은 철학적 흐름도 생겨났는데요. 형이상학적 토대와 권력이 역사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역과 가치에 대한 거부감이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분위기는 인간에게 중요한 내면세계에 대한 중요성과 훈련을 소홀이 여기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참 인간의 삶을 위한 내적 훈련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제는 내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를 훈련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전무하다 느껴집니다. 

출처: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57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곳에서 '더 많이, 더 크게, 더 편하게'를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물건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내가 누군지를 말하는 시대 속에서 내면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무력하며, 무가치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이 공허하여 허덕이는 사람들과 고립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잘못된 권위에 대한 경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소중함, 내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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