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와 '학습자 중심 교육'의 관계

IB 공부하기 2

by 진리의 테이블

오늘은 IB가 추구하는 '학습자 중심 교육'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양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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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다"로 대표되는 계몽주의의 힘찬 도약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의 힘을 얻어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난 후 전쟁의 폐허 위에서 앉아 있던 합리주의 철학자는 '인간은 이성적인가?', '인간 이성의 한계는 무엇인가?',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우리에게 안겨준 것은 무엇인가?'라는 처절한 질문을 해야만 했습니다.


플라톤 이후로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절대불변의 진리를 알려고 했습니다.

플라톤 시대에는 인간의 관념(생각)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합리적 대화를 통해서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책이 플라톤의 '대화편'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참 지식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정확히는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절대지식(개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마치 눈으로 무언가를 보듯, 이성이 절대지식을 본다는 것이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에는 플라톤을 위시한 헬라철학과 스토아 철학의 영향으로 '절대성'의 성격이 신에게로 옮겨갑니다.

인간은 변화와 불완전성 속에 존재하지만 신은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역사의 주관자이며,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알고 있으면,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숙명론 같은 것이 중세를 지배했습니다. 모든 권력은 신으로부터 나오기에, 신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신의 계획을 아는 사람들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상이 벌어집니다.

신 중심(사실은 인간 중심일 수도 있는)의 중세 사회는 과학의 발전, 르네상스 운동으로 대표되는 인문주의 운동의 거세 파도를 만나게 되고, 결정적으로 '종교 개혁'을 통해서 그 권위가 무너지게 됩니다.

종교 개혁도 '신 중심'을 중시하는 운동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만, 종교 개혁에서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것과 오직 성경으로(Solo Script)인 점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중앙집권적 교회의 제의와 성경 해석의 시대가 끝나고, 개인도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직접 듣는 역사의 천지 개벽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이때부터 역사 속에서 '개인'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개인도 신 앞에 인식되는 존재로서 서게 되어 말씀을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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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을 지식의 정점에 올려놓은 데카르트의 관념론이 근대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서 규정하였고, 우리에게 명확하게 인식되고 설명될 수 있는 자연과학을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전제 하에 과학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세기 제국주의와 과학적 지식의 조우는 엄청난 파괴력을 낳게 되고, 결국 세계 1, 2차 대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의 지성사는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던 낙관적인 역사관과 인간관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갖게 됩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는 말로 혼돈의 시대를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파괴적인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은 회의는 프랑크푸르트의 비판철학(자본주의 비판)과 미술사조에서의 다다이즘, 실존주의 철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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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거대담론'에 대한 의심입니다.

어딘가에 이상적인 세계가 있을 거라는 플라톤주의, 신이 교회를 통해서 이상적인 세계를 이루어갈 거라는 생각, 인류의 역사는 발전하며 과학이 구원을 이룰 거라는 근대의 희망은 모두 '거대 담론'이었습니다.

오늘, 여기를 말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고, 나와 너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인류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대담론'안에는 미래도, 개인도 없고 오직 특정 계급의 이익만이 대변되고 있다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실존주의의 거장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그 어디에도 '본질'이라는 하는 것은 없으며, 망상이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 있음'으로 인해서 '왜'라는 질문이 던져지고, 그 질문을 통해서 '의미'에 해당하는 본질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도달해야 할 인간의 사명이나 숙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여기서 살아감으로 나의 뒤에 나의 삶이 펼쳐지고 의미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

“여기 있는 이 ‘물병’은 ‘존재(存在, being)’한다. 이 물병은 이 모양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어떤 제작자에 의하여 디자인되었을 것이다. 물을 담을 의도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물병은 특정 용도를 위해 제작되었고, 특정 모형 틀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존재를 가지기 이전에는 하나의 ‘본질(本質, 물을 담으려는 용도와 기능, essence)’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그저 단순히 우선 ‘존재’할 뿐이다. 나의 인격은 전에 미리 계획된 모델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정해진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나의 ‘실존(實存, existence)’은 늘 열려 있고 나의 본질(용도와 기능)은 고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다른 사물과는 달리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그리고 이것이 사물과 차별되는 인간만의 존재 양식, 즉 ‘실존’이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實存)’한다. (…) ‘본질’은 고정불변이지만 ‘실존’은 고정되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 상태로 늘 열려 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의 ‘본질’을 논할 수 없다. 내가 죽으면 그때서야 나의 ‘본질’이 무엇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실존’하는 것이다."_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객관주의' 즉, 인간의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상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거대 담론에 대한 거부감 또는 그 허구성을 깨달은 철학 사조는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20세기 대표적인 교육철학인 '구성주의'는 실존주의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실존주의가 사유라는 것을 거대 담론과 객관이라는 장으로부터 미시 담론과 인간 실존이라는 장으로 옮긴 것과 마찬가지로 구성주의는 객관적인 지식과 그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교육에서 실존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지식으로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구성주의는 "지식은 세계에 대한 개인의 경험의 재해석이라고 가정하며, 객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소위 말해서 '학습자 중심 교육'이라는 것이 여기서 시작하게 됩니다. 기존에는 지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것도 결국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서 가공된 지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무조건 습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자신의 시각에서 재 구성된 지식만이 개인의 삶에 의미를 준다고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식 중심이던 교육이 개인 중심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구성주의는 또한 개인과 개인의 교류를 중시 여깁니다. 개인의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습득된 지식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서 공적 지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구성주의 인식론에서는 지식의 구성과 습득은 개인의 인지적인 측면과 사회적 상호작용 측면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실존을 본질보다 앞서는 것으로 여긴 실존주의와 학습자 중심의 교육은 전체보다는 개인을 거대담론보다는 미시 담론을 중시 여기는 현대적 분위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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