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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Mar 21. 2022

소크라테스의 위험한 질문

당연한 것에 질문하기

4대 성인하면 소크라테스, 예수, 공자, 고타마싯다르타(석가모니)를 꼽습니다.

석가보니는 불교의 창시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로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배했을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 경에 태어나 399년에 죽었습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구약의 예언이 종료되고 약 500년 동안의 침묵이 시작하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 동서양이 커다란 정신적 도약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아이러니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철학자는 아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철학사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주로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철학자로 인정되는 탈레스는 '만물은 물이다'라는 말로서 그의 철학적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탈레스

그의 주장은 세계의 근본(substance)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지금으로보면 물리학적 진술이죠. 처음의 철학자들은 물리학자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그들은 수학적 모델을 가지고 무언가를 증명해 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로 설명한 것이죠.

이 당시 철학자들은 '무엇이 무엇이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 무엇이냐?'라는 딱 봐도 철학자의 질문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물음의 방향은 세계를 향해 있습니다.

탈레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세계의 변화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것인가? 변화하지 않는 것인가?"

상식에 기초하면 세계는 당연히 변화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그 변화가 포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물이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거대한 시점에서 세계는 변화하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습니까? 변화하지만, 결국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요?

말 장난 같지만, 이 질문 앞에 답을 찾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도 함께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세계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이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

우리는 세계의 출발도 아니며, 세계를 만든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 내에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세계의 부분이면서도 세계 전체를 이해하려는 '질문'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질적 독특함과 위대함, 고통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인 알베르 까뮈는 그의 책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지포스는 고린토의 왕으로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날 그는 우연히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딸을 찾아 헤매던 아소포스가 코린토에 들르자 시지포스는 그에게 메마른 성채에 샘을 솟게 해주는 댓가로 딸의 행방을 알려줍니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지하세계롤 끌고 오도록 합니다. 타나시지포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타나토스를 쇠사슬에 묶어 버립니다. 죽음의 신이 활동하지 못하자 세상에 죽는 이가 사라지며 질서가 흐틀어집니다. 이를 우려한 제우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해주고 시지포스를 지하세계로 끌고 내려옵니다.

시지포스는 지하세계로 끌려가기 직전, 아내에게 자신을 절대로 장사하지 말고, 거리에 버려 방치하라고 신신 당부 합니다. 그러면 다시 살아올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데스 앞에 끌려온 시지포스는 자신의 시신이 적절한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며칠만 주면 지상으로 올라가 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의 시신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간청합니다.

시지포스를 딱하게 여긴 하데스는 그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지상에 올라온 시지포스는 예상대로 숨어버리고, 하데스는 시지포스를 찾지 못합니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전령 헤르메스를 통해 그를 찾아 내 지하세계로 끌고 온 후, 높은 산기슭에서 커다랗고 둥근 바위 하나를 그 산 정상까지 굴려 올려놓도록 합니다. 시지포스는 낑낑대며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지만, 이내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떨어진 돌을 또 다시 올려놓는 시지포스는 영원하 노역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은 인간.

까뮈는 인간 실존을 영원한 형벌을 받은 존재로 묘사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와 질문이 우리의 어깨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일견 수긍이 되지요? 누구 하나 자기 의지로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질문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지포스가 산 꼭대기로 운반해야 하는 돌 덩이가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일 수 있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말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이 거대한 질문에 답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질문의 무게에 짓눌려 버립니다.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속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자체가 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 소크라테스 때 부터입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질문이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 아테네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아테네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쇠약해지고, 사람들은 타락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타락하게 된 이유가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고, 어떤 이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을 지도자로 선출하며 나라는 점점 더 쇠퇴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지 중에서도 가장 큰 무지는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아테네의 가장 현명한 자가 소크라테스라는 신탁이 소크라테스에게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아는 자가 가장 현명한 자가 될 만큼 당시 아테네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테네에는 저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는 자들이 넘쳐났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에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형성하고, 확신에 차서 행동을 옮겼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들이 정말로 알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내면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경험에 현혹이 되어 무지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다이몬daimon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연과 인간사에 개입하는 비인격적인 신적 힘divine power을 가리키는 그리스어입니다.

감각은 변화하는 세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감각이 마주하는 세계는 변화하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기준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반면 내면의 감각, 이성을 통해서 접근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느 세계이며, 변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정의justice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정의는 '승자의 정의'입니다. 이는 플라톤 '국가'편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정의는 강자의 유익'이라는 주장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정의는 '강자의 유익'일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정의이죠.

하지만, '참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하게 됩니까?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행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것의 존재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저런 사랑이 많지만,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으로서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사랑의 참 모습, 그 존재의 본질을 묻는 질문입니다.


경험적 지식(가변 세계에 종속되어 있는)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지만, 내면의 능력을 통해서 밝혀내는 영원한 진리는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시민들이 경험한 신물나는 정치, 정의, 옳음은 원본이 아니며, 아직 우리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정치, 정의, 옳음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인간 내면의 힘을 '이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이몬은 내면의 외적인 힘이고, 이성은 그 다이몬을 추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지식이 아닌 영원불변하는 지식만이 아테네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지식을 사랑하는 자를 '철학자' 즉 '철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철인'이 다스리는 나라만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상을 가지고 있던 소크라테스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당시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민들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언이설로 시민들을 현혹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설계하고는 마치 공동체를 위하는 양 떠들어댔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했던 아테네 시민들의 내면에 '질문'을 통해서 작은 등불을 켜주었던 이가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맞나?'라는 질문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세계에 균열을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질문을 잘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특별히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에 질문을 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질문이 위험한 이유는 당연한 것에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일수도 있고, 무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예수도 유대 사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장로의 유전)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질문이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종교적 멍에들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예수의 질문은 그들의 기득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진실을 은폐하는 하는 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질문은 반가운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질문하는 행위가 위험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왜곡한 사람들은 질문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로는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었죠. 질문은 진리를 드러내주지 진리를 무너트리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질문이 찾고자 하는 답이 거짓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질문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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