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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산책방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돕니다

흰/한강/문학동네/2016

by 한산

이 소설은 이제 밝고 경쾌한 소설을 쓰겠다던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글은 아님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서사가 있는 소설이라기보다 이 작품은 순간순간 이미지가 연결된 연작시 같다. 작가는 '흰' 연관된 단어들을 목록화한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로 열거된 단어들. 자궁 같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강보'에서 시작해 '수의'로 끝난다. 삶과 죽음의 시간을 '흰'이라는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도덕경 첫 구절처럼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고 '흰'색의 의미를 하얀, 순수라는 고정된 것으로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제나 변한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은 시간으로 고정되지 않고 생명과 죽음은 따로 떨어진게 아닌 순환하고 공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돕는 걸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최근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말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을 수도 있고,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도 있다. 아니 산자가 죽은 자를 돕거나 죽은 자가 산자를 도을 수 있는 뫼비우스띠처럼 생각되어진다.

이 책은 전에 읽은 서사구조가 좀더 명확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보다 일련의 '시'처럼 표현된 단어별 짧은 글들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찾기에 어려웠다. '흰'과 어울리는 단어에 따른 해설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찾기가. 죽은 언니와 현재를 살아가는 주인공 화자가 매순간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뒤편에 나온 권희철 문학평론가 해설을 통해 작가는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과 혁명>을 쓴 김탁환 작가와의 만남 때 듣게 된 그 "질문"말이다.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 <채식주의자>에서는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에서는 "내가 정말 인간을 믿는가, 이미 나는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인간을 믿겠다고 하는 것일까?라고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말한다. <소년이 온다> 소설 제목이 어린 주인공 동호(소년)를 기억하라'가 아니라 소년이 온다라고 했다. 이 <흰>이라는 소설에서도 과거 언니의 자리에 태어나게 된 주인공과 공존하고 있다는 걸 곳곳 '혼'과 비슷한 낱말 '흰'을 대표하는 단어 목록에서 알려준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본문 39쪽, '초' 中에서)


이 '초' 대목에서 과거와 현재의 조우를 암시한다. 복원된 새 건물들이 아니라 칠십 년 전의 폐허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유령처럼 아니 우리식으로 혼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흰" 글에서 작가는 과거의 그가 마치 나처럼 더욱더 가까이 만나게 됨을, 연결됨을 이야기한다.


"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친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본문 135쪽, "모든 흰" 中에서)


현재를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과거의 소년은 온다고, 이러한 과거를 알게 해 준 이들 덕분에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책을 많이 읽었기에, 꼭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내용들이 전해졌기에 아니 어쩌면 한강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기에. 과거보다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있기에 지금의 현재가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여전히 어려운 한강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의 책 속에서 세계 어느 곳이나 연결되는 한국의 정서를 만난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정답을 찾기보다 질문을 던져야 한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흰"에 이은 '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기대한다. 밝고 경쾌한 소설도 더 나아가 약간은 쉽고 명랑한 글도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떤 색의 글을 써볼까 고민이 들었다. 여름 내 진한 향기 풍기는 풀과 온통 사방이 산이라 곳곳에서 바라본 푸른 나무들로 둘러 싸인 농촌에서 오래 산 기억으로 "초록" 또는 "녹색"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 관련 단어 목록을 수집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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