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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산 Sep 05. 2024

들녘의 마음

사랑과 혁명/김탁환/해냄/2023

" 내 본명은 이시돌, 옛 이름은 들녘이다. 무진년(戊辰年,1808년 봄 전라도 곡성현 장선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마을이름이 심심하면서도 깊다. 착함(善)이 순자강(鶉子江, 섬진강의 별칭)처럼 길게 이어지기를!"

이 대목이 근래 보기 힘든 장편 책을 읽게 된 계기다. 철저한 지연으로 각 500페이지 분량의 3권의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게 된 책이다. 곡성군 곡성읍 장선리에서 태어났기에.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권했다. 장선리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해야 한다면서 카톡을 남겼다. 답은 읽어봐야겠지였지만 실제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동창생 친구들에게 권할까 한다. 첫 권 625페이지 '일용할 양식'에서 조금 지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고 나간 건 지연(땅의 연결)의 힘이다. 


작가 김탁환 소설가는 곡성 이야기학교 글쓰기 교실 2기 수강생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쓴 글의 힘으로 이곳 브런치 작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때 쓴 10편의 글이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어오게 된 연결고리가 되었다. 모교인 동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것이다. 우리 때는 2층 과학실이었나 시청각실이었나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이 작가의 작업실이 되어 있었다. 1층 강의실은 우리 때 3, 4학년 교실 정도되었겠다. 그곳에서 학생처럼 열 번 수업을 들었다. 2021년 코로나 시기 마스크를 쓰고 들어 수강생끼리 서로 왕래는 없었지만 결석하지 않고 끝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기억에 남는 작가의 말은 어떤 글을 쓰든 자료가 충분해야 한다는 거다. 무슨무슨 공책이라고 해서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료수집과 인터뷰 내용, 배경지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면 위 우아한 백조의 자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고. 물속 수많은 발길질에서 비로소 탄생한 거라고. 이렇게 한 마을에 든든한 작가가 있다는 것은 문화의 힘을 키우는데 큰 버팀목, 디딤돌이 된다. 곡성이 부럽다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김탁환 작가를 보유한 것에 대해, 순천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한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읽었던 작가의 책은 마을공동체의 힘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것은 지키는 것이다', 와 정도전의 조선건국을 이야기한 '혁명' 이렇게 두 권이다. 그때도 혁명이라는 제목을 썼구나.'불멸의 이순신'은 드라마로 보았으니 포함해야 하나. 다음으로 이렇게 다소 무거운 제목 182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전남 곡성에서 일어난 정해박해 이야기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혁명'을 만났다. 무거운 추상명사 '사랑'과 '혁명'을 수행하는 주체인 주인공 '들녘의 마음'과 그와 함께한 이들의 삶이지 않을까. 


 이 소설의 배경은 자신의 노력으로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어도 오히려 빚을 지는 19세기 어두운 조선시대다. 논에 사는 벼만 바라보고 낮밤으로 기도하는 마음을 간직한 한 청년, 진인사대천명(眞人事大天命)이라고 자신은 노력만 할 뿐 그 이후는 하늘의 뜻이라는 마음으로 농부의 삶을 살아간 주인공 들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 들녘을 둘러싼 길치목, 공설이 아가다, 강송이 수산나, 짱구 등 당시를 살아간 젊은이들의 삶과 야고버, 요한, 공원방, 금창배가 대표하는 기성세대의 삶이 3권에 걸쳐 펼쳐진다. 짱구의 변신 그리고 재변신에서 느껴지는 믿기 힘든 허황된 설정도 있지만 2권에서 이어지는 소신을 지키려는 신자와 이를 비틀고 도망자를 찾으려는 간자와의 미묘한 심리전도 흥미로웠다. 마지막 부분 스포처럼 느껴질까 봐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행복한 결말이 아닌 주인공 들녘의 최후가 아까웠다. 종교소설 같지만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역사소설 같지만 설명만 하지 않는 다양한 인물의 삶 보여주기를 통해 독자들이 이 소설에 몰입하게 한다.    


"품격을 지키고 싶어서라오."
"천주를 믿는 이유를 들으면 들을수록, 격이 떨어지는 자들이라 여겼다오."
"격이 떨어진다? 어찌 그리 생각하였습니까?"
"공맹의 도리가 무엇이라 생각하오? 군자가 되기 위해 일신우일신하는 것이며, 인(仁)하는 것이 아니겠소?
한데 천주교인들은 군자가 되는 길,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천주에게 빌고 또 비는 게요. 지옥에 가지 말게 해달라고 빌고, 천당에 가게 해달라고 비는 식이요. 사랑하게 해 달라 빌지 말고 사랑하면 되고, 용서하게 해 달라 빌지 말고 용서하면 되고, 죄짓지 말게 해 달라 빌지 말고 죄짓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니겠소? 십이단(열두 개의 기도문)을 외울 시간에 열두 가지 사람다운 일을 하라. 그게 내 생각이라오. 수양하여 군자의 나라로 가는 것과 순종하여 천주의 나라로 가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오. 조선은 고귀한 군왕부터 가난한 시골농부까지 전자의 길과는 확연히 다른 길이며,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막는, 길도 아닌 길이라오. 천주교인이 사람들을 현혹할 때 즐겨하는 주장 중에 천주 앞에선 양반과 천민의 차별도 없고, 여자와 남자의 차별도 없으며 어른과 아이의 차별도 없다 하오. 하지만 천주교에는 영원한 차별이 있으니, 그것은 곧 천주라는 신과 그 신이 만들었다는 피조물인 사람 사이의 차별이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천주 발톱의  때보다 못하다오. 하지만 십맹일장(十盲一杖, 열 명의 장님을 위한 한 개의 지팡이)처럼 중요한 공맹의 도리가 무엇인 줄 아오? 
 군자는 제아무리 강력한 권세를 지닌 군왕과도 대등하다오. 공맹에선 신의 문제까지 따지진 않지만, 천주를 포함하여 그 어떤 신 앞에서도 군자는 대등하게 묻고 답하는 것을 포기하진 않소. 공맹의 도리에서 사람은 그처럼 높고 아름답고 당당한 자리에 앉았었소. 하지만 천주교에서 사람의 자리는, 설령 성인으로 추앙받는 자들이라고 해도, 천주에 비하면 하찮고 하찮을 따름이오. 그건 성인에 오른 천주교인들 스스로 고백하는 내용이기도 하오. 그래서 나는 공맹이 높인 사람의 품격을 낯 주는 천주교를 형편없는 종료라 여기는 것이오. 이토록 사람에게 해로우면서 또 마치 사람을 위하는 척 사악하니, 반드시 없애야 할 흉측한 믿음이 아니겠소?"

   

이 소설에서 기억나는 대사다. 당시 천주인을 잡는 금창배와 당시 관료인 조 봉 두의 주고받는 말이다. 금창배가 다 말했지만 당시 양반들 공맹을 따르는 이들은 이런 신념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양반이 아닌, 공맹을 따르지 않는  일반 평민들은 그렇지 않겠지. 들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빚을 지며 손해를 보고 오히려 횡포를 당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 왜 외세에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이고 주교를 모셔오려고 했는지 짐작이 조금 된다. 


"거짓말꾼 일수는 성이 모(牟)이고 이름은 독(獨)이라며 자신을 소개해 왔다. 홀로 평생 거짓말만 하며 살 팔자라는 것이다. 그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야기를 쓰면서 되짚어보니, 그는 언제나 돈 많은 자, 권세 쥔 자, 이름 높은 자들과 그들이 주장하는 세상을 모독(冒瀆)하며, 그 모독을 거짓말에 담아 지껄여대며 여기까지 왔다. 군왕은 물론이고 공자든 석 가든 모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천주 성부와 천주 성자와 천주 성신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댔을 것이다. 과연 모독은 탕아처럼 돌아와 신 앞에 무릎을 꿇을까. 나는 모른다. 다만 집 떠난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겨우 양털 한 가닥쯤 짐작할 뿐이다. 


신은 기다리고 인간은 떠난다."

이 소설에서 개성 강하고 묘한 매력으로 나아가 주목받았던 인물 '모독'의 마지막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가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일수 거짓말꾼들이며 상대의 지위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직업이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 그들은 신중해야겠지만. 모독의 이야기만으로 다음  속편이 나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온통 다 거짓말이라고 믿으면 신빙성이 떨어질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모독이 한 말은 다 그럴싸했다. 일수 거짓말꾼답게. 진실되고 그럴싸한 거짓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변하겠지. 


"이 이야기만은 세상 밖으로 보내야 한다." 

이 문장은 '나만의 십자가' 3권 마지막 부분 정해박해 후 천당과 지옥 같은 치명할 것인가 또 다른 도약을 위해 변절할 것인가 끄 감옥 속에서 보낸 11년 기간의 옥중기인 치명록을 전달하기 위해 책으로 정리, 기록하는 이는 들녘의 친구인 의외의 인물이었다. 갑작스러운 행운과 명예를 움켜쥔 뒤 사악한 욕심으로 다시 속죄하는 마음으로 본래의 육체를 받게 됨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이. 어쩌면 그는 자신이 그 이야기만은 꼭 세상 밖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명감, 아무리 멋진 이야기를 만들더라도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이 아닌 변하고 거창하게 혁명할 거라는 희망으로,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었다고 할까. 이 시대의 작가들의 사명처럼. 이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는 삶을 나누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을지 모른다는 희망말이다. 그게 일수(으뜸, 일진이라고 하면 어색할까) 거짓말꾼 모독과 함께 콤비를 이룬다면, 진심인 글과 말, 참언론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고 싶다. 거기에 더해 먹물인 개화파 지식인이나 권세 있는 종교인이 아닌 평면 한 우리의 주인공 들녘의 땅에 대한 신념과 소소한 실천까지 더해진다면 사랑과 혁명은 더욱 가까워져 한가닥 희망이 보이겠지.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꼭 밥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 자신의 이야기를 꼭 세상 밖으로 보내고 싶은 사람, 오랜만에 장편의 대서사를 넘고 싶은 사람, 섬진강 순자강처럼 위험하고 아름다움 사람들의 삶의 고개를 엿보고 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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