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호 앙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입 주변 근육을 힘겹게 끌어올렸다. 최대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해야 한다.
“어, 야. 너 나 빼고 여자랑 붙어 있으니까 좋냐?”
웃으며 말하자. 웃으며.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며 주변을 살폈다. 발이 저절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어디가. 나랑 술이나 마시자.”
민우는 나보다 키가 크고 운동을 했는지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웃으며 다가오는 민우는 꼭 태산 같았다. 운동장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공기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술 같은 소리 한다. 너 미쳤냐?”
“따라와. 끝내주는 술이 여기 있거든.”
거대하게 다가오던 민우가 나를 스쳐 반대쪽 공간으로 걸어갔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언뜻 본 그의 왼손에 주사기는 없었다. 집어넣는 걸 못 본 것 같은데. 일단 지금 당장 나를 어떻게 할 것 같지는 않으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보다 이 와중에도 술이라니 솔깃했다. 한번 맛이나 보고 도망가면 되겠지. 어이없게 입에 침이 고였다. 아까 올라오던 신물과는 달랐다. 이놈의 술. 한 모금만. 딱 한 모금만 먹는 거다.
와인이 양쪽 벽 가득 늘어져 있던 곳을 지날 때였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길쭉하게 튀어나온 허연 것이 보였다. 앞서가는 민우의 눈치를 보며 다가간 그곳에는 주사기가 있었다. 여자가 놔둔 건가? 어두운 복도로 들어서기 전에 얼굴 같은 것이 쳐다봤다고 생각했었다. 누구에게 쓰기 위한 것인지 모르지만 살그머니 집어 바짓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왠지 든든했다.
좁은 공간 한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었다. 민우는 망설임 없이 컴컴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발판이 좁은 사다리 같은 계단을 내려가니 갑자기 밀려오는 서늘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희미하게 떠 다니던 비린내 같은 것이 진하게 코 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앞에는 커다란 오크통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눈앞에서 사라진 민우를 찾느라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곳은 간이 병원 같았다. 침대가 3대 벽에 나란히 늘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람들이 팔에 뭔가를 달고 누워 있었다. 그중 한 곳에서 어떤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는 민우가 보였다. 어딘지 낯이 익었다. 민우가 일하는 바(Bar)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다. 둘이 얼굴을 딱 붙이고 이야기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나한테 이 빌어먹을 와인에 대해서 알려준 게 얘야. 어디서 가져왔는지 같이 먹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 한 때 죽고 못 사는 사이이기도 했는데 뭐, 옛날이야기고. 아무튼, 우리 한잔 할까?”
민우는 오크통 있는 곳까지 가더니 한쪽 구석에서 와인잔에 붉은빛의 와인을 따라왔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와인은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은근히 퍼지는 훈제고기 같은 스모키 한 향에 군침이 돌았다.
‘이거 한 모금만 마실 수 있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우리 짠이나 할까?”
민우에게 잔을 받으며 불현듯 들었던 생각에 깜짝 놀랐다. 술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미쳤나. 굶주린 사람처럼 잔을 부딪히자마자 입 속에 와인을 흘려 넣었다. 스모키 한 향이 온몸 가득 퍼졌다. 향과 다르게 부드럽게 혓바닥에 퍼지는 달콤함이 참을 수 없이 좋았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옆에서 민우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점점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해져 갔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들락날락하는 와인의 향이 영원히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모금 마시려고 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목 주변으로 차갑고 축축한 것이 감겨 왔다. 번쩍 뜬 눈에 비웃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민우가 들어왔다.
“야 이 새끼야. 이게 뭐 하는...”
숨이 막혀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직 조금 남아있는 와인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잔을 내 던지고 민우의 손을 풀어보려 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훈아, 이 와인 끝내주지 않냐? 재료가 뭔 줄 알아? 사람 피야. 나 이 와인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좀 도와줘. 금방 끝내줄게. 그리고 너도 맛있는 와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줄게.”
“미, 미친.”
발버둥을 치는데 허벅지에 닿는 둔탁한 느낌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주사기. 민우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숨이 막혀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남아있는 정신을 팔에 모아 주머니를 뒤졌다. 찾았다.
“어쭈. 웃어? 미친놈. 역시 넌 맛이 갔어.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지.”
목을 쥐고 있는 민우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저 와인을 한 모금만 더 먹을 수 있다면. 주사기를 쥔 손에 있는 힘껏 들어 올려 휘둘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