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_와인(가제)_4

다시 민우

민우의 어깨 위로 팔 하나가 쑤욱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희끄무레한 얼굴이 이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민우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유령인가 싶어 깜짝 놀라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비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겨우 참았다. 눈앞에 보이는 장식물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제발 들키지 않았기를 빌었다. 살짝 내다보니 민우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주책맞게 이 순간에도 오줌으로 가득 찬 방광은 빨리 화장실에 가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서 바닥을 짚고 일어나다가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느라 발끝을 들고뛰었다. 아까는 거리가 있어서 몰랐는데 복도 끝이 왼쪽으로 꺾여 있었다. 불이 나가기라도 한 건지 복도가 새카맸다. 얼마나 긴지 분간을 할 수 없어 새 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한순간 저 앞쪽에서 빛이 환하게 켜 졌다가 꺼졌다. 민우가 어딘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재빨리 쫓아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라도 빠질 것 같아서 한 발 한 발 내 딛기가 힘들었다. 문이 있으면 바로 찾아 들어가려고 벽에 손을 대고 걸었다. 민우 이 새끼는 뭘 한다고 이런 데를 가고 난리인지. 터질 것 같은 방광을 조이느라 흐르던 식은땀은 이제 귓속에서 펄떡 대는 것 같은 심장 때문에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행인지 뭔지 요의는 아까보다 덜 한 느낌이었다. 손 끝에 닿던 나뭇결의 거친 느낌이 차가운 금속의 서늘함으로 바뀌었다. 길쭉한 손잡이인듯한 것에 손이 걸렸다.


귀를 대 보았다.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있는 대로 귀를 대고 눌러봤지만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 같은 것만 날 뿐이었다. 땀에 흥건한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손잡이를 꽉 잡고 최대한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들이마신 숨을 다 내 쉬기도 전에 문은 열렸다. 환한 빛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 속을 쑤시고 들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렸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얼른 눈을 뜨라고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경고음을 울려댔다. 번개같이 집어든 눈에 양쪽 벽을 가득 채운 와인 병이 보였다. 공기 중에 시큼하고 비린듯한 냄새가 떠다녔다.


안쪽에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 것 같았다. 서둘러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양쪽에 천장까지 빼곡히 놓여있는 와인병을 스쳐 지나간 곳은 양 옆으로 뚫려 있었다. 소리는 오른쪽에서 나고 있었다. 조금만 내다봐야겠다는 생각에 한 발 내 디딘 그곳은 널찍한 홀 같은 공간이었다. 한쪽 구석에 이상한 장치와 함께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가운데쯤 민우가 서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 녀석은 웬 여자와 함께였다. 그냥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꽉 껴 안은 듯한 자세로 여자를 품에 넣고 있었다. 아 이 자식.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더니 혼자 할 거 다 하고 자빠졌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팔. 보통 좋아하는 사이면 서로 안을 때 팔로 몸을 두르는 게 정상 아닌가. 차렷자세처럼 몸통 옆에 팔을 늘어뜨리고 안겨있는 폼은 뭔가 좀 이상했다. 이건 여자가 싫어하는데 민우 이 자식이 덮친 건가?


“야 이 새끼야! 너 뭐 하는 거야!”


다른 걸 생각할 여유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순간 돌아보는 민우의 눈빛은 환한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것이 섬뜩했다. 한쪽 잎만 올려 씩 웃는 민우가 몸을 돌렸다. 아까 본 초승달이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마치 슬로비디오 같았다. 카메라로 사진을 이어 붙여 재생시킨 것처럼 장면이 하나하나 눈으로 뛰어들어왔다.


내가 뭘?이라는 듯이 양팔을 위로 드는 민우의 왼손에 들려 있는 주사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쓰러지는 여자. 통이 좁은 치마 탓인지 굽이 높은 구두 때문인지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였는데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새끼야, 뭐, 뭐야.”


이제 민우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세훈아 일어났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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