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나는 멀쩡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잘 나갈 줄 알았다. 이름만 대면 알아먹는 학교를 다니기도 했거니와. 이름이 박힌 성적표를 내밀면 누구나 얼굴에 호감 가득한 표정을 단박에 떠올렸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성적표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띄우고 곧 연락하겠다며 인사하던 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한동안 스스로 일을 찾겠다며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가방 속에는 밤새 책상 앞에 앉아 손 끝이 허예지도록 볼펜을 잡고 쓴 이력서가 신줏단지 모시듯 들어있었다. 면접을 보느라 억지로 끌어당긴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무렵. 나다니기를 관뒀다. 원래도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쩌다 나갈 일이라고는 억지로 불려 나가는 술자리였다. 뒤치다꺼리용으로 불리는 걸 알면서도 기어나갔다. 늘 걸치고 있는 목이 늘어난 얼룩덜룩한 티셔츠와 삼선 슬리퍼는 어느새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야! 삼선!”
“어서옵쇼. 삼선님, 오늘도 질질이네?”
필요할 때만 친구타령하는 것들은 나를 이름대신 ‘삼선’이라 불렀다.
“수복 씨, 우리 뭐 먹을래요?”
그녀는 늘 내 이름을 불러준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허스키하지만 질리지 않는 목소리는 감미로운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어디 가서 이름을 말하면 수박인지 수북인지 잘못 들을 때가 많아 다시 물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어찌나 짜증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일그러뜨린 얼굴은 상대방에게도 짜증을 선물한다. 덕분에 괜찮다며 소개받은 일의 면접자리에서 몇 번이나 퇴자를 맞고 돌아와야 했다. 이놈의 성격은 나이가 먹을수록 영 나아지지가 않는다. 원래 꼬인 놈이라서 그러는 걸 지도 모르겠다.
“저기, 이름 다시 한번 말해 줄래요? 제가 잘 못 들어서요.”
뭐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미안하다는 듯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르 되묻는 그녀는 귀여웠다. 나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내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주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는 귀에 착 붙어 자꾸만 듣고 싶었다. 게다가 어찌나 잘 맞춰주는지. 만날 때면 내가 무슨 왕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깨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고개가 쳐 들려서 곤란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영’이었다. 동그라미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동글동글 귀여운 이름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그녀의 부모님의 센스를 반만 가지셨어도. 아마 내가 이름 때문에 꿀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점점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매일 만났지만 헤어짐은 늘 아쉬웠다. 하루 24시간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나는 말 그대로 일에 쩔어 있는 상태였다. 밤에는 편의점. 낮에는 엄마가 물어다 준 잘 나간다는 회사의 영업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른 아침 알람 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키면 어색한 정장에 억지로 몸을 끼워 넣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을 쪽 빼고 나면 밥 먹을 힘도 남지 않는다. 해가 지고 지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집으로 향할 때면 나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당연히 그녀를 만날 시간은 손에 꼽을 만큼밖에 남지 않는다. 아쉬움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로 달랜다. 이야기하며 손에 쥐고 들여다보는 통장에 쑥쑥 늘어가는 숫자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녀와 나. 단 둘만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자금. 내가 그녀 몰래 세운 비밀계획을 위한 밑거름이다.
햇볕이 잘 드는 아담한 방을 구하기까지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장마가 시작될 무렵 일을 시작했는데 이제 길가는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걸쳤다. 통장에 표시된 숫자가 너무 적었지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집을 계약하고 받은 작은 열쇠가 모든 수고를 보상해 주는 것 같았다.
그날은 깜짝 이벤트와 함께 그녀에게 열쇠를 전해주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퇴근하기 위해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마음이 급하니 걷는다는 것이 자꾸만 종종걸음을 했다.
겨우 시간을 맞추고 퇴근을 하기 위해 회사 정문을 향했다. 뛰느라 바쁘게 굴러대는 구둣발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높은 톤의 발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수복 씨.”
맡은 일은 다 끝낸 뒤였다. 다시 회사로 불려 오지 않으려고 확인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급해죽겠는데 누군가 싶어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험한 얼굴을 하고 치켜드는 눈에 세련된 붉은빛 정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실내임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처음 보고 ‘멋있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장처럼 붉고 반짝이는 입술이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