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그녀
"아 씨...“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육두문자를 가만히 삼켰다. 그녀는 내가 다니는 'S그룹' 회장의 딸이었다. 회장 딸 답지 않게 싹싹하고 일 잘하기로 사내에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니 멀쩡하게 생겨먹은 장남을 놔두고 후계자로 지목이 됐겠지. 밑에 사람을 놔두고 왜 제 발로 뛰어다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세...”
아 참. 이름이 뭐더라. '세영' 이던가 '세희' 던가. 가만. 입사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름을 듣고는 '아영'의 동그랗고 하얀 얼굴을 떠올렸었다. 아마도 '세영'이 맞을 것이다. 확실할까? 정말? 이름 하나 부르는 것뿐인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잘못 부를까 걱정이 돼서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리듯 대답을 했다. 제대로 알아듣기를 바라며.
"세영 씨... 아니, 세영님 퇴근하는 길이신가 봐요. “
“퇴근은 무슨 퇴근이야. 나 지금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이야. 수복 씨. 오늘 일정 남았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지.”
"제가 급하게 가볼 곳이 있어서요. 이미 카드도... “
말을 하며 저절로 손이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가슴팍에 와닿는 무게감이 기분 좋았다. 열쇠에 곱게 감겨 있는 리본이 손 끝에 부드럽게 존재감을 알려왔다. 말을 하며 얼른 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인사를 하며 한 걸음 내 딛일 때였다. 그녀의 팔이 내 팔에 와서 감겼다. 진하지만 향기로운 향과 함께 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겉보기에 말라 보였는데... 가슴이 이렇게 컸던가? 아니 속옷도 안 챙겨 입나. 이건 완전 노브라 각인데?’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가 벌게진 귓속으로 날아들었다.
"어머, 수복 씨 입 벌어졌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음흉한 생각이라도 한 거 아냐 이거? 아까부터 얼굴이 벌건데? “
눈을 가늘게 뜬 세영이 재밌다는 듯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머릿속 생각을 들킨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하필 거기에 그녀의 가슴골이 있을 건 뭐람. 당황해서 허둥지둥 거리는 사이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붉은 등이 번쩍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영에게 빨리 가야 한다고. 오늘의 근사한 저녁을 위해 예약한 레스토랑에 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고.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야속하게도 발이 제멋대로 세영을 따라 움직였다.
'아 변태새끼.'
내가 생각해도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지랄 맞은 몸뚱이. 머리로는 욕을 했지만 몸이 반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영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대충 봐도 눈에 확 띄는 오픈카가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조수석에 나를 밀어 넣고는 익숙한 솜씨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수복 씨. 지금부터 일본 출장 간다. 4박 5일. 필요한 건 다 준비해 놨으니까 몸만 따라오면 돼. “
"예? 내일 단골 거래처와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
"아 그거? 내가 다 확인해서 담당자 넘겨놨어. 내가 못하는 게 어딨니.“
언제 불을 붙였는지 가죽장갑을 낀 그녀의 한쪽 손에는 기다란 담배가 들려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담배 끝의 붉은빛이 도드라져 보였다. 한껏 빨아들이는 중인지 붉은빛이 점점 진해졌다. 최면이라도 걸린 듯 그녀의 붉은 옷과 담배를 쳐다보았다.
문득 여권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입고 있는 체크무늬의 후줄근한 사각팬티도 신경 쓰였다. 시간을 좀 주면 편의점에 가서 갈아입을 옷이라도 사는 건데. 태어나 처음 가는 외국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 주머니 속 물건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