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행동으로부터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눈치 채지도 못할 그런 것.
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간 첫 MT에서 눈이 맞았던 그는 과에서 인기 탑을 달렸다. 그는 늘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팝콘 같은 웃음소리는 덤. 운동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학교 내 온갖 운동 동아리에서 그를 섭외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마디로 ‘울트라캡숑나이스 짱’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그런 그가 처음 술이라는 것을 마시고 벌게진 얼굴을 어쩌지 못하는 나를 보고 사귀자고 했을 때에는. 술 한잔에 취해서 헛것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너, 참 예쁘다. 나무젓가락이 계속 가지런한 것이 좋아.”
날 보고 예뻐서 좋다는 건지. 안주를 집어 먹고 놓아둔 젓가락이 좋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한동안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벌어진 내 입으로 침이 떨어졌던가. 그는 내 입술 근처를 엄지 손가락으로 쓱 쓸어내더니 비어있던 내 잔에 술을 가득 담아 원샷을 했다.
“크으... 달다. 달아. 야. 우리 간접키스 한 거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빈 술잔을 놓여있는 젓가락의 넓은 부분 끝머리에 가지런히 맞춰 올려놓았다. 그리고 티슈를 한 장 집어오더니 그 위에 새우맛이 나는 과자를 동그란 모양이 되도록 단정하게 올려놓았다.
“먹어. 빈 속에 술 마시면 몸 상해.”
손에 부스러기가 묻는 게 싫어서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젓가락으로 티슈 위 과자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동그랗게 모여 있는 과자가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 조심조심 위에서부터 꺼내 먹었다.
과자가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술이 바쁘게 잔을 가득 채우다가 사라졌다. 생애 처음 남자의 관심을 받아서 그랬던가.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는데 정신은 점점 말짱해졌다. 벌게진 얼굴로 그의 숨소리와 말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말을 하며 움직대는 입술에 신경이 쓰였다.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도 그는 입술에 과자부스러기 한 톨도 묻히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고 난 뒤 번들거리는 그의 입가가 섹시하다는 생각에 가끔 멍하니 쳐다보기도 했다.
“왜. 내 입술에 뭐 묻었어?”
“어? 아, 아니.”
“아까부터 내 입술만 쳐다보던데.”
술 마시고 떠들 줄만 아는 줄 알았더니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답할 말이 없어 애꿎은 술만 입에 들이부었다. 아까 그는 술이 달다고 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쓴 건지. 저절로 찡그려지는 얼굴에 크아- 하는 괴성 같은 탄성까지 뱉어냈더니 그가 웃는다.
“이야, 너 술 좀 마실 줄 아는구나?”
괜히 민망해서 안주나 집어 먹으려 젓가락을 들었는데 아뿔싸. 방금 전까지 수북했던 길쭉하고 바삭한 새우과자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괜히 입맛만 다시며 젓가락을 들여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언뜻 본 그의 젓가락도 테이블 끝 선에 맞추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나는 남자라는 종족은 선생님 아니면 아빠 정도여서 어른 남자를 가까이서 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술잔을 나누고 말을 섞는 게 처음인 건 말할 것도 없고.
갑작스럽게 취기가 올라온 탓에 벌게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고맙게도 머리카락이 달아오른 볼을 적당히 가려주었다. 손을 뻗어 괜히 술잔을 입에 댔다.
“나가자.”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이 손목을 잡아채는 탓에 술잔에 넘실대던 술이 춤을 춰댔다. 그게 뭐라고. 얌전히 술잔을 돌아다니지 않는 술을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
“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가. 시끌벅적 떠들어대던 주변 사람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모아진 시선들이 뾰족하게 찔러대서 온몸이 따끔거렸다. 온몸을 문질러대며 일어났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딱 붙은 입은 떨어질 줄 몰랐다.
“술, 술. 아 얘가 술 떨어졌다고 이렇게 날을 세우네. 천상 술꾼이야. 술꾼. 여기 술 더 필요한 사람!”
그제야 멈춤 버튼이 해제되었다. 사방에서 소리가 되살아났다. 여기저기서 술 이름과 필요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는 대답을 하기 위함인지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함인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잘도 무어라 장단을 맞춰댔다.
“얼른 나와.”
웃는 얼굴을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그의 손에 끌려 치렁대는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늘어뜨리고 귀신처럼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마다 꽃봉오리가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아직 봄은 저만치서 올까 말까 뜸을 들이는 중이었다. 바람을 쐬니 뱅글뱅글 돌던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아까 소리는 왜 질렀는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아까는 미안. 너 술 넘쳐서 소리 질렀지? 나도 취했나. 힘 조절을 잘 못했네.”
속에서 신트림과 함께 밀려 나오는 한숨을 쉬어대고 있는 와중에 그의 사과를 받았다. 타이밍이 왜 이모양이야.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심장이 얼굴에라도 들러붙었나 싶을 정도로 두근거리던 얼굴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환. 내 이름은 이환이야. 너. 수연이지? 최수연.”
“어? 어. 어...”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는 그나마도 진정되었던 심장이 밖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
“너. 우리 학교 1등으로 입학했다며. 교수님들이 그러시더라.”
아주 잠시 어쩌면 얼굴 혹은 패션 센스 같은 나만 모르는 매력을 모두가 알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성적이 눈에 띄었나. 이 녀석도 숙제나 빌려달라고 하는 족속 중 하나구나. 사람을 자기 필요할 때나 써먹는 도구 대신으로 생각하는 막돼먹은 놈들. 이제껏 내 앞에서 착하게 군 것들은 대부분이 그런 것들 뿐이었다.
“...씨... 야. 나 들어간다.”
이런 놈들은 미리 들러붙기 전에 싹부터 잘라야 한다. 뜨거운 숨이 짜증으로 들끓어 거칠게 튀어나왔다. 아무렴 어떤가. 계속 볼 것도 아닌데. 다시 들어가려고 몸을 획 돌렸다. 그놈 자식의 얼굴이 보기 싫어 일부러 땅만 보고 걸었다.
“어디가.”
깜짝이야. 눈앞으로 길고 단단해 보이는 팔뚝이 안전바가 내려오듯 멈췄다. 놀란 가슴을 속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있는 힘을 다 해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저리 꺼지라는 마음속의 중얼거림과 함께.
“아우. 무서워. 야 나 잡아먹지 마. 나 이래 봬도 되게 맛없다.”
표정을 어떻게 해 볼 여유도 없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맛이 없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 눈빛이 잡아먹을 것 같기라도 했다는 건지 뭔지.
“어? 웃었다. 너 지금 웃는 거 내가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