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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 남자를 만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여자가 많으시다던데.. 좀 그게 걸리네요."

by 프니

"여자가 많으시다던데.. 좀 그게 걸리네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자, 이거 봐. 얘는 내가 작년 바닷가에서 만난 앤 데, 이거 버리면 자기 안 만나준대서 가지고 있었던 거거든? 근데 네가 찢으라면 찢을게." 그의 손에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하트를 그리고 있는 두 남녀의 스티커 사진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곧 스티커 사진을 손으로 찢으려 했고, 잘 찢어지지 않자 카운터에 가서 가위를 빌려오는 쓸데없는 용기까지 냈다. 조용한 카페에는 싹둑싹둑 자르는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이후 그가 보여준 행동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는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있는 여자들의 연락처를 하나둘 삭제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잘라라, 연락처를 지워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제야 "아, 이건 고백이 아니라 협박이구나... 나 이러다가 당하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무서웠다. 10년이 흐른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데, 그보다 더 소름이 끼치는 사실은 그런 그의 구애를 결국 받아들였고,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백을 받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고통받는 연애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만 바라볼 것 같던 그의 구린내 나는 실체를 알게 되었던 그날, 하늘은 무너졌고, 나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내가 신뢰했던 그의 진심이 거짓이었고, 심지어 뒤에서 딴짓거리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은 날 미치게 하기 충분했다. 여기서 더 환장하는 사실은 그때의 내가 그를, 아니 나의 사랑을, 나의 선택을 무조건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 그의 실체를 보고도, 스스로 눈을 가리고 연신 흐린 눈으로 그를 대했다. 그렇게 하면, 나의 진심이 닿아 그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그는 내 앞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좋게 넘어갈수록, 남는 건 고통


그를 처음 만나기 전부터 찝찝했던 "여자 문제"는 날이 갈수록 그 수위가 높아졌다. 단순 여사친부터 시작한 문제는, 헌팅 술집, 노래방 도우미, 그리고..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여사친 문제로 찝찝했을 때, 술 먹고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 나에게 집에 간다 하고 번화가에서 술 먹는 모습을 내 친구에게 들켰을 때, 술 먹고 길에서 잠들었다고 했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아니, 그냥 애초에 시작을 말았어야 할 인연. 그와 나는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었다.

그를 이해하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사랑을 갈구한 것은 그가 아닌 나였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해를 하고 선의를 베푸는 것도, 상대가 떠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연애를 끌어 온 것도 모두 나였다. 오히려 그는 내가 자기를 더 이상 믿지 못해서 힘들었다는 명언을 남기고 떠났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은? 슬프게도 상처를 받아 갈기갈기 찢긴 내 마음뿐이었다.


당시 핸드폰 메모에는 한 사람이 적은 것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2013.04.13 오후 7:57]
나는 앞으로 연락이 안 되면 곧 의심을 할 거고, 의심을 한다는 건 믿음이 없다는 거니까.
관계속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이 깨져버렸으니까. 알잖아. 오빠도.
이제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드러운 돈 벌지 말고 떳떳하게 벌어. 처신 똑바로 하고 살아.
[2013.05.04. 오후 9:39]
다짜고짜 의심 받는다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쁠 지 생각해보면 정말..미치겠어.
너무 미안해서..이성적이지 못했어. 다시 한번 카톡을 몰래 보거나 오빠의 행실을 의심하는 행동을 해서 오빠 마음 상하게 하지 않을게. 오빠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더라도 꼭 답장해줘.............더이상 잡진 않을게 ㅜㅜ
[2013.05.26. 오후 10:39]
내가 사랑한단 말 원하는 것도 아니고 오빠 못 봐서 속상한 마음 억누르고 보낸 응원하는 내용이나 영화보고 싶다는 단순한 문자에도 아무 반응 없을 땐 난 자존심 상해..............무조건 오빠 쪽에 맞춰서 오빠를 이해해줘야지 하다보니 난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아. 오빠의 마음 속에서뿐만 아니라 내 삶에서 나자신의 모습도. 난 어디로 가야 될까.
[2013.08.03. 오후 2:22]
이별은 한번도 안해봐서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왜 해야하는지 몰랐어. 내가 그만 두어야 할때 그만 했어야 됐는데.......그래서 이렇게 되버렸어. 내가 말했던 게 그렇게 큰 부탁이 아닐거란 생각이었는데........

그를 만나는 내내 나는 술과 여자 문제로 사랑 같지 않은 사랑을 했다. 그것도 사랑이라고, 사랑만큼은 꼭 지켜내고 싶었다. 그래서 답이 오지 않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에게 차마 전할 수 없던 말을 메모장에 뱉었다.


모든 관계가 다 좋을 수는 없고, 서로 맞춰 나가야 하니 때로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제가 여자 문제라면? 폭력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 이거 좀 이상한데? 찝찝한데? 한 번은 넘어갈까?(여자, 폭력, 술 문제 등등) 등의 문제라면 더더욱 시간을 지체할 것도 없다. 아니다 싶을 때는 시간을 끌지 말고 끊어내는 것, 조상신이 보내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카페 문을 열고 그의 앞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내게 크게 소리치고 싶다.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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