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는데요, 또 왔습니다.
80년대에 태어난 나는 축복받은 세대였다. 88년 올림픽의 영광을 어렴풋이 아는 체할 수도 있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크고 작은 노력들을 했던 시대였다. 이를테면 산타할아버지의 비밀 같은 것. 그렇게, 어른들의 숭고한 노력이 빛을 발했던 시대에 태어난 나는 꽤나 오랫동안 그 달콤한 존재를 철석같이 믿었다.
9번째의 크리스마스이브, 엄마는 언니와 내게, 할머니 집에서 잠을 자라고 했다. 매번 집으로 오시던 산타할아버지가 우리가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라시면 어떡하지, 우리 선물을 다른 집에 두고 오면 어떡하지 등의 걱정을 했지만 엄마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다. 엄마의 말은 곧 법이었고 율법이었던 언니와 나는, 그렇게 할머니 댁에 도착해 할머니와 맛있는 밥도 먹고, 화투로 그림 찾기 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양말도 걸어 놓는 게 어떠니?”
푹신한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마친 언니와 내게 할머니는 벽에 양말을 걸어 놓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혹시 산타할아버지가 용돈이라도 주고 갈지 모르잖니?”
허허 웃으며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잘 안되었지만, 아무래도 산타할아버지와 동년배인 할머니의 제안은 엄마의 말만큼이나 믿음이 갔다.
언니와 나는 이불을 팍 차고 벌떡 일어나 내일 신을 예정이었던 양말 두 쪽, 그러니까 총 네 짝의 양말을 부엌 벽 고리에 대충 걸었다. 꽤나 두껍고 기다란 양말들이 할머니 집 벽에 힘없이 걸려 있는 모양을 보니 흐뭇하면서도 웃겼다. 내일이 되면 저 양말들을 보고 또 웃을 수 있겠지?
베란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밝은 그림자, 그 빛이 우리를 깨웠다. 1년 중 가장 떨리고 설레는 12월 25일 아침. 어린이들은 이 날을 위해, 이 순간을 위해 1년을 달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남은 밥을 싹싹 긁어먹고, 개학 일주일 전부터 온 힘을 다해 밀린 방학 숙제를 했던 것도, 먹기 싫은 시금치를 억지로 먹었던 것도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이불속에서 내복 소매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다 조심스레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다. 이게 웬걸. 밤새 배송 착오가 생길까 봐 걱정했던 나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시고 지혜로우신 산타할아버지는 올해에도 변함없이 나와 언니에게 선물을 주고 떠나셨다. 언니와 나의 선물 포장지가 똑같은 것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원하던 선물을 받았다는 그 사실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우리에게는 또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우리에게, 부엌으로 와보라며 손짓을 하셨다.
"맞다!! 양말!!"
단걸음에 달려가 벽에 걸려있는 양말에 손을 뻗었다. 마술사의 검은 모자에서 비둘기가 나오는 것처럼 내게도 곧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순간이었다. 과연 산타할아버지는 내게 얼마를 주셨을까, 못해도 오천 원은 주셨겠지?, 엄마에게는 비밀로 해야지, 언니에게도 뺏기지 말아야지, 저금통에 넣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빨간 실, 초록 실이 엉클어져 있는 양말을 벽에서 빼온 우리는 거실 바닥에 앉았다. 원하는 선물도 받았기에 큰 욕심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반응을 엿보니 산타할아버지가 확실하게 보너스 선물을 챙겨주신 게 틀림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양말에 손을 뻗은 우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기다랗고 기다란, 천 원 지폐가 몇 장은 족히 들어갈 그 양말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10원짜리와 50원짜리가 전부였다.
땡그랑.. 땡그랑..
조용한 햇살이 들어오던 거실 바닥에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들이 우리를 보고 킥킥 거리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산타할아버지가 용돈을 얼마나 주셨는지 물어보셨다.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원하는 선물을 받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크리스마스. 엄마방에 슬그머니 열려있는 옷장 구석에서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 포장지와 같은 포장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엄마에게 물을 것도 없었다.
"이거 먹어야 산타할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주시지"
산타할아버지에게 무슨 선물이 받고 싶은지 편지를 써보라며 내게 종이와 연필을 내밀던 엄마의 얼굴이 스쳤다. 일 년 전에 방 안에서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찾아낸 것만 같았다. 그랬구나, 그랬어. 엄마가 산타였구나..?
그러니까, 그 가여운 초등학생은 돈은 없지만, 눈치는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산타할아버지를 믿던 언니와 나를 위한 할머니와 엄마의 합작품이 아니었을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양말 사건은 장난을 좋아하셨던 할머니의 귀여운 장난이었다. 다음에 만난 할머니는 엄마 몰래, 우리에게 용돈을 쥐어주셨다.
산타할아버지가 외국 사람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루돌프를 타고 오는 건 알겠는데, 루돌프가 몇 마리나 필요한지, 굴뚝을 타고 온댔는데, 우리 집은 7층 아파트인데 어떻게 들어온다는 것인지에 대한 것들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순수함은 이제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산타할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행복하고, 캐럴을 들으면 마음속의 전구가 깜빡깜빡 빛을 내며 쿵쿵 댄다. 산타할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냈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는 것은, 산타할아버지가 주었던 기대와 설렘의 빈자리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소중한 사람들 덕분아닐까. 그러니까, 이제 내게 산타할아버지는 없지만, 그럼에도 산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