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장면이 많아지기를
홈쇼핑에서 김장김치를 팔고 있었다. 가운데는 한 연예인이 배추 속에 김치 양념 속을 열심히 넣고 있었고, 양옆으로는 김장 조끼를 입은 쇼호스트 두 명이 앉아있었다. 새빨간 양념이 하얀 배추에 차곡차곡 쌓이는 게 재밌어서, 멍하니 보고 있던 그때였다. 쇼호스트가 말했다.
"어우, (이렇게 옆에서 말만 하니까) 꼭 못된 시누이가 된 것 같아요."
엥? 무슨 소리지. 같이 방송을 보던 남편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요즘도 저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널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군침을 돌게 하던 김장김치가 참 맛없게 보였다.
우리가 예민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저런 말을 들어 본건 오랜만이었고, 퍽 유쾌한 말이 아니었다. 여전히 단무지를 다꽝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노다지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도 있다. 잘못된 말이라 하여도, 사람들이 쉽게 쓰다 보면 그 말은 또 후대에게 전해지고 만다. 쇼호스트의 저 문장에서 답답함을 느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시대가 변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많아지고, 더 이상 신혼부부들은 합가를 하지 않고, 양가 식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내는 부부들이 많아졌다. 물론 못된 시누이는 여전히 존재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게 된다면, 또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바통 터치하듯 전해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시누이는 못된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데 한몫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지영아 막 나대, 더 나대"
여러 번 취업에 낙방하는 지영에게 아버지는 시집이나 가라며 기를 죽인다. 눈물 젖은 밥을 먹던 지영에게 용기를 주는 건 엄마. 막 나대면서 살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살지 못한 본인에게 외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 세대만 해도 결혼하면, 주부가 되어야 한다는 프레임이 강력했던 세대니까.
한때 극장가에는 조폭영화가 주를 이었었다. 그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남자였다. 여기도 남자, 저기도 남자, 온갖 남주인공으로 가득 찬 영화관의 열기를 분산시키게 만든 주인공이 나타났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는 김지영을 통해 여자들이 겪었던,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덤덤히 전했다.
개인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은 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고,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우리 사회는 82년생 김지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몇 주 전 종영된 산후조리원에서도, 여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같은 여자임에도, 아직 겪어보지 못한 여자의 출산 이후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간접경험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으로만 들었던, 아름다운 동화이야기처럼 알고 있던 여성의 출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공중파에서 까놓고 보여주니 또 색달랐다.
시가식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초보 며느리의 며느라기 이야기, 카카오 드라마 며느라기도 화제다. 시어머니 아침상을 챙겨드리기 위해 전날 밤 시가에서 잠을 자겠다는 며느리, 시부모 결혼기념일도 챙겨주는 며느리, 아들에게는 갈치를, 본인에게는 무를 건네주는 시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못 하는 며느리를 보며 우리는 분노한다. 그리고 하나둘 같은 말을 내뱉는다.
"요즘도 저런 며느리가 있다고?"
"요즘도 저런 시어머니가 있어?"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전히 저런 며느리와, 저런 시어머니가 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시가 식구들에게는 무조건 이쁨을 받아야 한다는 프레임, 며느리에게는 어느 정도 갑질 해도 된다는 그 프레임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보통의 (여자) 이야기가 하나 둘 티브이를 통해, 극장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다행이다.
82년생 며느라기 김지영의 산후조리원 이야기를 많은 이들이 열린 마음으로 듣고 공감해주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프레임에 눌려 억압된 행동을 하지 않는 여자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더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를 바란다. 정말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