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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Feb 26. 2021

못 먹어도 고, 고고고고고스톱이 알려준 교훈

새로움의 재미가 널려있는 일상

(비상!) 아파트에 폭탄테러가 발견되었다는 경비아저씨의 말에 허겁지겁 역으로 달려갔다. 주민들을 만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며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그때였다. 아스팔트 위에서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고 작당모의라도 하듯 모여 앉은 세명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말했다.


"저도, 껴주세요"

"네네, 아 저 광 팔게요."


그들은 화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당장 살 곳이 없어질지 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피를 모으며, 홍단을 부르짖으며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아, 이 얼마나 건전하고 정신건강에 좋은 놀이인가. 입맛을 다시며, 패를 던지며 눈알을 좌우로 돌리다가 팍! 눈이 떠졌다. 그것은 물론 꿈이었다.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오징어젓갈을 보니 2월(매조)이 떠오르고, 신발장에 쓰러져있는 우산을 보고는 비광이 떠올랐다. 미쳐버린 거다.


화투를 알게 된 건, 8살 때였나.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와 언니와 함께 그림 맞추기 놀이를 했었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갈 때까지도 나의 화투 수준은 발전되지 못하고 정체되어있었다. 이유는 복잡하고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러니까 노잼일 거라 생각하고 내 인생에 화투란 없다고 확신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몇 주 전이었다. 명절을 기념하여 남편이 화투를 사 왔다.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 남편의 설명을 들었다. 역시 어려웠다. 점수를 계산하는 것도 어렵고, 무엇이 쌍피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렵고, (제일 좋아 보이는) 광을 두 개나 가지고 있어도 점수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냥 모든 게 어려웠다.


그런데 한판, 두 판, 한 시간, 두 시간 치다 보니 어느 정도 화투의 흐름을 알게 되었고 남편의 돈을 따오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나는 화투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 우리는 매일매일 화투를 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난 굉장히 진지하며, 생각보다 더 중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화투는 그동안 내 삶에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신발장 안쪽, 티브이 서랍장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도 철저히 외면했던 내가! 대쪽같이 단호하던 내가! 하루에 화투를 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게 되는 비상사태까지 이르렀으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또 다른 화투를 찾아서

나는 새로운 길보다는 늘 지나다니던 골목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 가본 길 끝에 후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내 선택에 겁이 나서 항상 뒷걸음질 치며 골목길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식으로 살다 보니, 항상 먹던 것만 먹고, 항상 보는 것만 보는 반복형 인재가 되었는데.


글을 읽을 때도 소설보다는 에세이 위주로 읽었고, 시트콤과 드라마도 10년 전 것을 보고 또 보고, 치킨은 네네치킨과 페리카나 두 개의 선택지만 있는데, 며칠 전 나는 치킨계의 화투를 찾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굽네-고추 바사삭 치킨.

바삭바삭한 튀김을 벗겨내는 재미로 치킨을 먹었던 나로서는, 굽네치킨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신발을 튀겨도 맛있는 튀김요리인데 왜 치킨을 구워? 하며 냄새조차 맡고 싶지 않다며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던 지난 시간을 뒤로한 채, 오늘부터 나는 굽네치킨 홍보대사가 된 것이다. 구우면 맛이 덜하지 않을까? 했던 노파심은 부드러운 속살을 깨물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와 씨, 굽네 미쳤네? 왜 진작 먹지 않았던 거지?


흥선대원군급의 척화 사상을 가지고 살았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베란다에는 남편이 사다 놓은 장기판이 있고, 냉동실에는 어머님이 주신,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생선이 통으로 들어있고, 선물로 받은 두꺼운 소설책이 책장에 꽂혀있다. 항상 내 옆에 있었지만, 재미없을 거 같아서, 요리하기 힘들어서, 취향이 아닐 거 같아서 모른 체 했던 것들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화투를 치고서야 알았다. 노잼이라 여겼던 상징물들이 사실은 발견되지 못한  꿀잼일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앞으로  열심히 화투를 쳐야겠다. 일상에 널브러진 새로운 재미를 발굴해내는 것도 나의 몫이니까. 마음속에 세워둔 척화비들을 하나둘 지워나가는 것도 나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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