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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Feb 19. 2021

하루를 채우는 말들

1.

요즘따라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아 일 드럽게 하기 싫네"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부정적인 감정이 말보다 앞서서 맘을 고쳐먹고 "아 일해서 행복하다"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일이 더 하기 싫어졌다.




2.

24시간 중 잠자는 8시간을 빼면 16시간을 깨어있는데 그중 내가 입을 벌려 성대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입으로 말을 출력하는 시간은 몇시간이나 될까 생각해봤다. 남편이 저녁 7시쯤 들어와서 12시쯤 자니까, 최소 4시간정도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입버릇처럼 "여보는 왜 그렇게 웃겨","여보는 날 왜 그렇게 좋아하는거야,정말"같은 말을 제외하면 또 별말을 안 한다.


잠들기전, 서로의 장점을 하나씩 말해주기로 했다. "여보는 정말 착해", "여보는 설거지도 정말 깔끔하게 해." 정도의 무난한 칭찬을 해주다가, "여보는 정말 잘생겼지"라고 했더니 남편이 침을 분수처럼 튀기며 웃었다. 나도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다. 서로 웃었으니 됐다.





3.

저녁 6시쯤에는 동생에게 전화가 온다. 주말을 제외하고 주중에는 무조건 오는데, 어제는 전화가 없길래 무슨일이냐 물었더니 친구의 졸업식에 다녀왔다며 그 이야기를 10분동안 읊었다. 동생과의 대화도 우스갯소리가 80프로인데, 누나는 왜 그렇게 동그랗게 생겼냐고 선창하면 너는 날 닮아서 더 동그랗게 생겼던데 무슨말이냐고 방어한다. 그러니까, 서로가 동그랑땡이다, 추파춥스사탕이다, 다코야끼다, 오징어땅콩이다 하면서 놀려대는게 일상이다.


하지만, 엄마는 오늘도 임영웅노래를 듣고 있는지, 아빠는 무얼 하는지, 언니는 야근을 많이 안 하는지, 오늘 저녁메뉴는 무엇인지 등등의 최신가족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끝에는 "응, ㅇㅇ누나."라는 말을 한다. 10분 내내 호칭 없이 떠들더니 마지막에서야 정신을 차리는 나의 멋진 동생.




4.

지나간 말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또 없다. 작년까지 열심히 썼던 블로그를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을 친척들에게 소개시켰던 날에 쓴 글이다. 특히 더 불편했던것은, 큰고모부의 존재때문이었다.


실연 당한지 얼마 안 된 20대 초반 나에게, 지나치게 결혼을 장려하는 고모부의 말에 순간 욱해서,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명대사를 날렸고, 하하호호하던 웃음소리가 헐헐헉헉으로 바뀌었고, 그날밤 나는 엄마에게 버릇없다며 등짝을 맞았다. 그랬던 내가, 가장 먼저 결혼을 한다고 말을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었는데..역시 말조심해야한다. 아니, 몇년 전 그말처럼 내가 알아서 잘 했으니까 맞는 말을 한건가?하하





5.

이번주에는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말 드럽게 바빴기때문이다. 일이 계속 들어오는 것에 감사함을 가지자고 마음을 고쳐먹어도, 싱글벙글이가 되어 마우스를 잡기란 통 쉬운 일이 아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 노트북을 들고 채광 좋은 카페에 앉아,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키보드를 두둥탁 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죽여준다. 말의 힘은 강하다고 하니까, 매일매일 입밖으로 내뱉기로했다.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되버릴 수도 있으니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 감사한 일이다.





6.

오랜만에 별 생각 없이 글을 써본다. 확실히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내게는 말하는 것보다는 글쓰는 것이 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떤날에는 한문장도 쓰지 못해 손가락으로 어버버 거릴때도 있다. 어렵다, 어려워.





7.

말을 할수록 더 싫어지는 것이 있는가하면, 말이라도해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있고, 말을 못해서 혹은 말을 해버려서 후회가 되는 것도 있다. 말을 하는게 맞는 건지, 참는게 맞는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인간의 난제.





8.

돌고돌아 결론은, 나의 하루를 채워주는 말들은 생각보다 거창하고 대단한 문학같은 말이 아니라, 비교적 가벼운 말들이 대부분이라는 . 그러니까 하루를 살아내는데는  힘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하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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