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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를 잘라내는 단순한 방법

고작 그런 일이니까.

by 프니

행복과 낭만이 가득한 캠퍼스에서 나는 구남친을 만났다. 그는 대뜸 나를 불러 고백을 했다. 4월이었다. 어제까지 복학생 선배에 불과했던 그가 오늘은 나의 남자 친구이라면서 잘 잤느냐고 묻는 문자에서는 실수로 김치찌개에 빠져 눅눅해진 돈가스처럼 묘한 맛이 났다.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종합강의동 식당이었다. 메뉴는 돈가스와 알밥. 나는 돈가스를 먹겠다했다. 그는 뚝배기에 붙은 밥풀까지 싹싹 긁어먹더니, 내가 먹고 있던 돈가스를 콕 집어먹으며 말했다.


"다음에 더 맛있는 돈가스 먹으러 가자"


호언장담하던 그는 약속을 지켰다. 문제는 그 약속을 지켜내는데 약 2년이 걸렸다는 것인데, 더 슬픈 사실은 그날이 내 생일이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강남 쪽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만나자마자 밥이나 먹자며 나를 이끌었다.


하얀 간판이 유난히도 빛나던 깔끔한 식당이었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유명 식당이 아니어서인지 가게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파스타도 있고, 리조토도 있고, 피자도 있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식당이었지만, 우리는 돈가스만 시켰다. 돈가스는 역시 훌륭했다. 소스의 신맛이 강했지만, 밥을 밀어 넣으니 괜찮았다.


끼익.

작은 식당에는 돈가스칼이 썰리는 소리만 들렸다. 고요한 적막감이 도는 그곳에서 나는 칼을 잠시 내려두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우리 밥 먹고 어디 가는 거야?"

"글쎄? 뭐 해야 하지?"

"아, 나 이 동네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돌아다녀보자"


돈가스가 담긴 그릇 위로 그의 무심함이 툭하고 떨어졌다. 몇 주 전부터 우리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나는, 풀려버린 그의 동공을 보면서, 식사를 하며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그의 손끝을 보면서 서운함이 터졌다. 내 딴에는 무심결에 기대 아닌 기대를 하고 나온 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에 초를 불고, 진심이 담긴 카드 하나면 충분히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날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는 문자로도, 만나서도 축하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꾸역꾸역 마지막 남은 돈가스를 밀어 넣었다.


"근데 오늘 내 생일인 건 알아?"

"알지, 그래서 돈가스 먹으러 왔잖아"

"아니, 나는 축하한단 말이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내가 편지 받고 싶다 했잖아. 편지는?"

"(한숨) 아니, (한숨) 뭔 편지야. 언제까지 편지 타령이야."


생일 축하노래 대신 편지 타령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23살의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돈가스칼을 내려놓은 뒤 울어버렸다. 감정이 이성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돈가스칼을 방패 삼아 지난 시간의 서운함을 모조리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다시 한번 쪽팔림을 무릅쓰고 냅킨으로 눈물을 닦아낼 뿐이었다.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하는데..


가게를 나와 정처 없이 동네를 걸었다. 카페에 들어가서도 그는 별말을 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했다. 나 또한, 핸드폰에 빠져있는 그에게 별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생일날 보기 좋게 차인 여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의 전투력으로 그때로 돌아간다면, 돈가스칼에 돈가스 소스를 흠뻑 묻힌 후에 뚝뚝 떨어지는 소스를 그에게 내밀며 <네가 뭐라고 이렇게 열 받게 만드는 거냐, 니 생일도 아주 주옥같이 만들어줘? >라고 하겠지만, 당시 나는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너무나 지고지순한 여자 친구였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무조건적인 분노 표출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지만, 무조건적으로 마음속으로 담아두는 분노는 훨씬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


10년이 지나버린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것을 보면, 그때 나의 분노가 진심이었구나, 얼마나 후회가 되면 이럴까 싶어 스스로가 아주 잠깐 안쓰러워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다시 돌아가서 뿅망치로 가격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인 것을.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에 고구마를 밀어 넣은 것처럼 답답해질 때는, 우아하게 왼손에는 포크를, 오른손에는 돈가스칼을 쥐어본다. 이건 그저 내가 돈가스를 먹고 싶어서 자르는 게 아니라고, 돈가스칼로 마음의 불순물을 함께 잘라내는 것이라는 의미부여를 왕창 하면서 고기를 잘라본다. 돈가스 하나에 후회를, 돈가스 하나에 미움을, 돈가스 하나에 분노를..


나는 오늘도 흑역사 퇴치라는 좋은 핑계로 돈가스를 먹는다. 과거의 모든 아쉬움과 후회를 돈가스에 가득 담아 목구멍으로 쏙 넘긴 후, 잘근잘근 씹어버리면 그만일 일이니까. 고작 그런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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