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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 만든 배를 얼려 먹어야 하는 이유

by 프니
여러분, 갈아 만든 배를 얼려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이건 얼려먹어야 한다고요. 이 짓은 뿌셔뿌셔를 끓여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거든요.






오랜만에 숙취에 시달리던 남편이 갑자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나.... 잠깐... 홈플러스.. 좀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는 힘없이 집을 나섰다. 코끼리 같은 몸으로 개미 소리를 내던 남편의 손에는 <갈아 만든 배>가 들려있었다. 남편은 커다란 유리컵 하나를 꺼내어 그 음료를 따르고 곧장 입으로 꿀꺽꿀꺽 넘겨대기 시작하더니 캬~~ 하는 추임새를 장음으로 냈다. 마치 눈앞에서 씨에프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 저게 마케팅이다, 저거지 저거. 곧장 달려가 컵을 뺏어 갈아 만든 배를 마셨다. 음? 맛있기는 한데 시원하지 않아서 그런지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아이스음료를 먹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입안에 깊게 스며든 달달함과 기억력이 좋은 콧구멍은 또다시 갈아 만든 배를 목구멍으로 넘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시 여전히 아쉬운 맛이었다. 조금만 시원하면 더 좋을 텐데, 그럼 딱일 텐데. 나는 곧장 갈아 만든 배의 위치를 냉장실에서 냉동실로 조정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이는 적재적소 원칙에 준하는 슬기로운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갈아 만든 배)가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아주 조금의 시간을 주는 것. 그러니까 냉동실에 갈아 만든 배를 넣어놓고 30분-1시간 정도 딴짓을 하면 된다.




"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오차범위가 적은 시계. 시계 중의 시계는 배꼽시계라는 말이 맞았다. 나는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때에 갈아 만든 배를 냉동실에서 빼냈다. 화끈하게 차가워진 페트병을 잡고 있으니 흥분의 온도는 올라갔다. 이제 컵에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시시한 졸졸졸 소리가 아니라 와르칵와르칵 하는 소리를 내며 꿀렁꿀렁 컵으로 떨어지는 갈아 만든 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먹기 위해 존재한다고.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마시고싶다..

수양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은 뒤, 심호흡까지는 할 필요 없지만 최대한 차분한 상태로 맛을 보고 싶었다. 컵을 들었다.. 가 달콤한 향에 훅 하고 당해버렸다. 여유는 개뿔. 곧장 입으로 컵을 갖다 대고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크으으으으, 이거지 이거. 살얼음이 적당하게 배치된 내용물은 정말이지 감히 글로 설명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황홀한 것이었다.


목구멍을 거쳐 빠른 속도로 온몸으로 퍼져가는 차가운 살얼음과 갈려진 배의 콜라보는 2021 올해의 음료상 부분에서 좋은 결과를 받아야 마땅할 맛이었다. 이번에는 남편이 내가 먹던 컵을 뺏어서 마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와! 이거 완전히 탱크 보이네!!" 아 맞다. 어디서 많이 먹어본 거 같더라니. 배로 만든 아이스크림, 탱크보이의 맛이었다. 남편은 연신 탱크보이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갈아 만든 배를 마시면서.


나는 곧장 옷을 갈아입고 탱크보이를 사러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가 다시 바지를 벗었다. 탱크보이와 갈아 만든 배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우리가 지금 먹고 싶은 건 탱크보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갈아 만든 배를 얼려 마셨는데 탱크보이가 당겨서 그것을 사 먹으면 맛있기는 하겠다만 간 건 간 거고, 탱크는 탱크니까. 우리가 지금 맛있게 먹는 건 탱크가 아니라 갈아 만든 거니까... 반대로 냉동실에 두어야 할 탱크보이를 꺼내어 방치해 녹여먹으면, 갈아 만든 배 맛이 날 것 같지도 않다.



갈아 만든 배의 정체성

마지막으로 남은 한 방울의 갈배를 마시며 생각했다. 갈아 만든 배의 정체성은 배를 갈았다는 것. 조그마한 동네 슈퍼에만 가도, 수십수백 가지의 음료수들 속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갈아 만든 배, 그 수많은 것들과의 차별성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찾는 갈아 만든 배. 특별한 광고를 하지 않아도 꾸준히 판매가 되고 있으며 2002 월드컵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갈아 만든 배.(1996년 출시) 숙취해소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갈아 만든 배. 늘 사이다, 환타를 고르며 눈길도 오래 두지 않았지만 신상 음료와 인기 음료 사이에서 우둑허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갈아 만든 배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버티자,마시자,즐기자.


갈아 만든 배를 마셨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미쳐버린 것 같다. 무인도에 세가지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냉장고와 갈아 만든 배를 가져가고 싶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정도로 나는 진심이다. 아무튼 갈아 만든 배의 살얼음 버전을 꼭 한번 경험해보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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