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맛있기만 한 청국장
오늘의 저녁 메뉴 선정 건으로 깊은 고뇌를 하며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한없이 게으른 나는 머릿속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갓김치, 파김치, 겉절이, 김장김치, 총각무, 팽이버섯 등등이 있는 거 같고.. 음 냉동실에는 뭐가 있더라.. 비비고 만두, 생선가스, 얼음, 부시맨 빵,, 아 아니 왼쪽에 뭔가 있던 거 같은데.. 아 그 뭐지.. 비닐에 담아놓은 그.. 아!!!!!!! 비로소 천장 벽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의 형태.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워 냉동실 문을 열었다. 그래,, 네가 있었구나! 청! 국! 장!!!!
청국장은 내게 힐링푸드 그 이상이다. 20대 때는 기력이 없을 때마다 추어탕을 먹으면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는데, 30대가 되니 추어탕을 먹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만성 피로증을 달고 사는 내게 청국장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렇다.30대의 나를 키운 건 청국장이었다.
웃긴 건 서른이 되어서야 청국장을 먹어 본 것도 아니다. 엄마는 격돌에 한번 꼴로 청국장을 끓였다. 교복 셔츠에 진하게 냄새가 배길 때면 난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청국장을 째려봤다. 항상 구린 냄새만 나는 청국장을 끓이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며칠 동안 빨지 않은 양말 고린내 나는 것"이라고 칭하며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렇게 개무시를 하고 살았다. 내가 감히. 나 따위가 청국장을.
그런 내게 조심스레 다가 온 청국장, 그와의 재회는 작년의 일이다. 남편의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였다. 경상도 상주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휴게소란 휴게소는 무조건 들러서 호두과자에 김밥에 간식을 챙겨 먹었다. 할머니 댁에 가면 나물밖에 없을 거라는 남편의 말에 겁이 난 탓이었다. 도착하기 도전에 배가 부를 대로 불렀다. 그렇게 도착한 할머니 댁. 할머니 댁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맡았다. 그의 냄새를
가자마자 만난 할머니 댁의 밥상, 나물밖에 없을 거라던 남편의 말은 철저하게 틀렸다. 김치, 양질의 수육과 멸치, 콩나물, 고추볶음, 우리가 포장해 간 주꾸미, 그리고 때깔부터 남다른 그, 바로 청국장이 있었다.
밥 한 공기 가득 받아 경건한 마음으로 상 앞에 앉았다. 야리꾸리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냄새가 그날만큼은 달랐다. 구수한데 고소하기까지 하다니.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속으로 외치며 조심스레 그에게 숟가락을 맡겼다. 뭐지? 이건 먹어보지 못한 청국장의 맛이야. 분명 청국장인데 왜 이렇게 맛있지? 그동안 내가 먹은 청국장은 페이크였나? 몰래카메라??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호두과자로 더부룩했던 속이 사르르 편안해지는 느낌 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배달음식,패스트푸드로 가득찼던 몸안이 가벼워지는 느낌. 몸속 가득하게 퍼지는 건강함이었다.
그닐 이후로 나는 청국장에 미쳐버렸다. 할머니 댁에서 가져온 청국장이 다 떨어졌을 때 나는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주저앉아 울 뻔했다. 우연히 찾아낸 청국장 맛집에서, 대략 20인분의 청국장을 구매하고 나서야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다. 요즘도 힘 없이 골골 댈 때면 자연스럽게 청국장을 물에 풀어버린다. 훠이훠이 저으며 서있다 보면 당당하게 구수함을 품어내는 청국장의 재치에 웃음이 절로 난다. 그제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입에 쓴 약이 병에는 좋다는 말처럼, 코에 쓴 청국장이 몸에는 좋으니 말이다.
킁킁
킁킁킁
오늘 저녁에도 청국장을 끓였다. 냄새를 맡자마자 황홀한 기쁨을 느꼈다. 청국장은 역시 배신을 모른다. 언제나 구린 냄새를 풍기는데 변함없이 맛있으니까. 이제서야 30년의 의문이 풀렸다. 엄마는 왜 그렇게 청국장을 끓였는가, 엄마는 왜 가족들의 반발에도 청국장을 놓지 못했는가. 이제는 그 답을 알 것만 같다.
구리구리 하고 구수한 청국장의 냄새를 오래도록 맡고 싶다. 기분이 다운될 때 청국장 냄새를 맡으면 갑자기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도 해봤다. 청국장의 냄새를, 청국장의 맛을 오래도록 내 옆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겠다는 다짐까지 이르렀다. 죽을 때까지 먹고 싶은 음식이 또 하나 생겼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이미 든든해진 금요일 밤, 나는 또 청국장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