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메리카노의 쓴 맛, 돈 맛.

by 프니

교복은 벗었지만 뿔테안경은 벗지 못한 갓 스무 살이 된 친구와 나는 야심 차게 지하철에 올라탔다. 젊은이들의 동네라고 소문 났던 그곳, 홍대를 가기위해.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흰 눈이 펑펑 내린 탓인지 , 평일의 낮이어서 그런지 홍대길거리에는 젊은이들은 둘째 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낯선 골목을 몇 바퀴 돌고나서야 온 건물이 눈처럼 하얀 카페가 나타났다. 널찍한 카페의 푹신한 쇼파에 몸을 누우니 오늘의 고생은 벌써 보상 받은 듯 했다. 점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설레는 맘으로 메뉴판을 보자마자 친구와 나는 고요속의외침을 시작했다.


<야, 왜 이렇게 비싸?>

<여기 잘 못 들어온 거 아니야?>

<나갈까?>


하지만 지금 나가기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흰 눈이 퍼붓던 홍대 카페에서 눈을 피한 값으로 고구마라떼에 8천원을 지불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대학을 졸업했다. 역시 세상은 더더욱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몰랐던 나는 우선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동남아자유여행이었고,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 자연스레 알바를 시작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알바생만 10명이었다. 알바생들끼리 모여 카페를 간 날이었다.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 하니 메뉴판의 글씨도 흐릿하게 보였다. "가만 보자, 나는 커피를 못 먹으니까 아이스초코, 어? 아이스초코가 3 천 오백 원?" 그제야 떠오르는 사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던가?


나는 잠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가방 속, 주머니속에 있는 돈을 수색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동전들을 모으니 1,900원이라는 거금이 나왔다. 아니 사실 턱없는 돈이었다. 이걸로는 아이스초코를 못 사 먹는데 어떡하지? 물만 먹겠다고 할까? 아니야 그럼 돈이 없어 보이겠지. 어쩔 수 없이 짤랑거리는 동전을 손에 쥐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카운터에는 여전히 주문을 하지 못한 사람들로 북적였도고, 이제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처음 보는 직원에게,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것도 아이스가 아닌 핫으로.(핫이 더 저렴..) 너무 뜨거워 호호 불어 먹으려 해도, 커피 특유의 쓴맛은 마치 술처럼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레 주름이 잡히는 내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아니 용을 쓰며 커피를 넘겼다. 찰랑거리는 얼음이 든 아이스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며 웃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돈만 벌면 내가 이 맛없는 커피는 절대 사 먹지 않겠다고. 가장 이름이 길고 가장 비싼 음료를 사 먹겠노라고.


@unplash

취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돈을 버는 대로 모으지도 않고, 버는 대로 쓰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값비싼 안마의자를 할부걱정 없이 사줄 수 있는 부자도 아니고, 여전히 8,500원 음료를 보면 바로 외면하고, 6300원짜리 식빵을 보고 백스텝으로 빵집을 나오는 그런 어른일 뿐. 하지만 슬프지도 않고 서럽지도 않다. 돈이 부족해서 먹지 못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지 않고, 먹고 싶은 아이스초코를 선뜻 사 먹을 수 있는 산뜻한 서른 세 살이 되었으니까. 정말, 그거면 되지 않은가? 그러니까, 아메리카노가 알려준 돈맛은 쓰지만은 않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청국장은 배신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