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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Apr 14. 2021

연인의 시간을 가지자는 말의 함정-상

"나는 진짜 너랑 결혼...(오열)하고 싶은데.....(콧물 마심)..."

갑자기 술에 취해 전화를 한 B가 엉엉 울면서 말했다.

"근데 뭐??.."

"근데... 너는... 너는(한숨과 오열) 아직도 공부 중이고 오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짐 좀 챙겨서 나올 테니까 기다려."


당시 나는 공시생이었다. 시험이 두 달 남은 시점.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B의 오열 전화를 받았다. 서둘러 짐을 싸고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와 퇴실 버튼을 누르며 B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동안 감정을 추스렀는지 B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더니 꽤나 무거운 목소리로 지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자기가 내게 너무 부족하다나 뭐라나,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다나 뭐라나.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재차 물었지만 B는 빙빙 둘러대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다. 펑펑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전화를 하느라 손은 얼어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간을 갖자고?"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워...(다시 오열)"

"아, 그래. 그럼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될까? (일주일 정도 생각함)"

"음,,, 세 달 정도?"


세 달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루가 24시간이니까 일주일이면 168시간. 요즘에는 일도 법적으로 52시간으로 제한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168시간이면 족할 일이 아닌가? 세 달이라는 값은 도대체 어떻게 계산된 것인가. 나는 B가 지금 술을 먹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여 일단은 알겠다고 했다. B는 나의 말을 듣자마자 너무 고맙다며 또 울었다. 이 새끼 뭐지? 울다가 또 울고 근데 세 달이나? 어쨌든 그렇게 B와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B에게 구구절절한 카톡이 와있었다. 그동안 자기 여자 친구로 살아주어서 행복하고 고마웠다고, 세 달 동안 잘 기다려달라는 말을 강조하는 읍소문 같기도 하고, 이별 메시지 같기도 한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아, 이 새끼 진짜 뭐지? 진짜 세 달을 채울 작정인가?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오후 12시가 되어도 B에게 "잘 잤어?"따위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지는 않지만, 안 사귀는 것도 아닌 뜨거운 아이스커피 같은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일주일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B에 대한 마음의 모양이 미움보다는 그리움으로 변해갔다. 분명 첫날에는 괘씸했는데, 어쩌면 다시는 만질 수 없을지도, 아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일까. 놀이공원에서 엄마를 잃어버렸을 때의 공포스러운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험을 앞두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문제집을 보는 대신 인터넷에 나 같은 사례를 찾는데 급급했다.


"남자 친구가 시간을 가지재요.."

"남자 친구가 잠시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데.."


역시 나 같은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B 같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글쓴이들은 남자 친구에게 길게는 2주, 짧게는 3일 정도의 시간을 부여받았다고 했다. 그렇지, 누가 봐도 세 달이라는 시간은 말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나는 한 줌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었다.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다가 다시 만나서 결혼까지 했다는 케이스는 거의 없었다. 나는 다시 점점 초조 해지기 시작했다.


연락도, 공부도 할 수 없던 나는 다시 힘을 끌어모아 B를 이해하려 애썼다. 왜 시간을 가져야 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부터 찾으려 머리를 굴렀다. 아니 근데, 헤어지고 싶었으면 진작 헤어지자고 하면 되는 것을, 시간을 가져야만 가능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그렇구나, B도 우리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니 시간이 필요했구나라고 이해를 하려 해 봐도 세 달은 진짜 아니다 싶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느낌,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고요한 적막이 꼭 폭풍전야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을 가진 지 2주가 채 안 된, 12일쯤 결국 나는 B에게 카톡을 보냈다.




"잘 지냈어?."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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