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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n 16. 2021

살고 싶어서 했던 소개팅

조신에 죽고, 조신에 살았던 소개팅

B는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본인의 일인 듯 주먹을 쾅쾅 내리치며 대신 열불을 내주는,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시간을 정해두고 계속 연락을 해주는 소중한 친구들이 내 옆에 있음에 감사하고 든든했고, 그들의 따뜻한 위로 덕분에 나는 조금씩 사람다운 행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있었는데..


하지만 배신과 분노를 과다 복용함에 따라 심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랑?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생각했다. 진심? 이 세상에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부모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생각했다. 한때는 사랑이라는 단어에도 쉽게 감격해 울컥도 하던 나였건만, 사랑 따위는 개나 줘야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부끄럽지만, 그 입으로 소개팅을 구걸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한입으로 두말하기, 내가 잘하는 짓 중 하나였다. 2018년 6월 말 경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부여잡고는 몹시 간절하게 부탁했다.


남자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 사람도 아니었지만 지금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면 몇 주 뒤에 있을 B의 결혼식장에 깽판을 치러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름 끼치게 잔인했던 B의 배신에 온몸이 떨리던 때였다.


그렇게 <조신한 남자>에 꽂힌 나. 조신 타령에 질릴 대로 질린 친구들은 도대체 조신남이란 게 무어냐고 물었다. 그 당시 내가 목놓아 외쳤던 조신남이란  주변에 여자가 없고, 여사친이 없고, 바람 기질이 없고, 누구에게나 다정하지 않은 사람. 즉 B와는 반대의 사람을 의미했지만 사실은 나도 잘 몰랐다. 그저 B와는 다른 평범한 사람이 이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죽기 전에 확인해 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는 시간을 두고 두 명의 사람을 소개받았다.  (편의상 1,2호라고 지칭)


가장 먼저 만난 1호는 놀라울 만큼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식을 먹고 싶다던 내게 파스타집에 가자고 하질 않나, 줄줄이 소시지보다 더 많을 것 같은 여사친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나, 스타벅스에 가자고 하니 된장녀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나. 내가 그토록 찾던 조신남과는 매우 거리가 멀고도 먼 사람이었다. 대충 커피까지 마신 후 나는 버스 타고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는 숫자가 적힌 아무 버스를 잡아 탔다. 수요일은 아무래도 두부가 왕창 들어간 된장찌개를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애프터 연락은 하지도, 오지도 않았음)


기대주, 2호를 만났다. 2호는 만나기도 전에 실소를 터트리게 한 인물이었다. 형광빛 펩시 티셔츠를 입고 하늘 높이 점프를 하는 2호의 프사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2호를 데리고 약속한 삼겹살집으로 갔다. 삼겹살집은 굉장히 소란스럽고, 정신이 없는 게 소개팅에 딱 제격인 곳이었다. 된장찌개에 밥도 먹고 싶다는 말을 참은 채 대화를 시도했다.


"광주에서 사셨던 거죠? 광주 저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아 정말요? 광주 볼 거 없는데~"

"왜요, 민주화의 성지잖아요!"

2호는 아, 또야?라는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 그 광주가 아니라 경기도 광주, 곤지암 정신병원 있는 그 광주요.. "

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열심히 불판 위에 구워지는 고기를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이번에도 망한 것인가. 하지만 자리를 옮긴 카페에서 2호와 나는 신명 난 사람처럼 떠들어댔다. 2호는 유재석 같았고 나는 박명수 같았다. 어찌나 웃기던지 내가 던지는 주제마다 착착 대화를 이어가는 2호에게 나는 뜬금없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묻고는 서둘러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 처음 봤는데, 이런 말 웃기네요. 죄송해요.(ㅋㅋ) 대답 안 하셔도 돼요."


2호는 나한테 이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라는 표정으로 찡끗 웃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커피잔에 담겨 있던 얼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떠들었다. 자신의 핸드폰을  손에 쥐어주면서, 앨범을 켜놓은 채 7월에 다녀온 대만 여행, 재작년에 다녀온 파리 여행기를 압축 요약해서 말하는 2호의 말재간에 나는 취해 버리고 말았다.


술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술술술 이야기가 끊기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2호의 입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이랑 결혼하겠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종교인데,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그것도 무난하게 넘어갈 것 같고?,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정신 차려!"


정신 차려보니 3시간이 지났다. 나의 체력은 얼음처럼 녹아버렸지만, 여전히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이 신명 나게 떠드는 2호에게 혹시 집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막차시간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그 어엿한 덧니를 보이며 아직은 괜찮다며 웃던 2호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준 후에야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몇 시간 전에 구워 먹은 삼겹살 냄새가 그 작은 버스에 금세 퍼졌다. 코를 킁킁대며 나는 카톡을 보냈다. 지하철을 타러 뛰어간 지 고작 3분이 지났을 때였다.


"2호님, 왜 연락이 없어요!!?"


미쳤네, 왜 연락이 없어요? 라니, 조금 더 부드러운 표현을 할 수 없었는가, 한탄하며 머리를 창문에 박고 있는데 2호에게 답이 왔다.


"아, 제가 지하철 타느라 좀 뛰어가지고.ㅎㅎ죄송해요."

"앜ㅋㅋㅋㅋ네. 우리 다음에 또 언제 만날래요?"


이 사람이라면 진짜 사랑을 보여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헛된 소망일지, 확실한 희망일지는 두고 봐야겠으니 다시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해 마음이 앞선 탓에, 나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덜컹 거리는 마을버스 안에서 마음이 울렁대기 시작한 것도, 배신과 분노의 과복용으로 인한 사랑 사망선고가 내려졌던 내가 다시 한번 사랑과 희망의 알약을 집어삼킨 것도, 분명 몇 주 전만 해도 죽고 싶었던 내가 조금 살고 싶어 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갑분사, 갑자기 분위기 사랑과 전쟁> 매거진이 이제 중반을 넘어갔습니다!! 초반에는 이별을 당했을 때의 아픔과, 극복하는 과정을 솔직하게 풀어서 이별에 힘든 분들에게 자그마한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또 사랑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네요. 하하.. 이제는 반복된 배신의 아픔으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제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을 통해 다시 한번 온전한 사랑을 느끼고, 회복하게 되는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와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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