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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n 22. 2021

돼지껍데기는 사랑을 싣고

"혹시 껍데기도 좋아하세요?"(돼지껍질이 올바른 표현)

"껍데기 하면 또 저죠."


백과 함께라면 고무도 씹어먹을 의향이 있을 만큼,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콩깍지가 제대로 낀 상태. 그러니 메뉴는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영등포맛집에서 다시 만났다. 화요일이었다.  

그 식당은 영등포지역 내에서 가장 시끄러운 노포 집이었다. 서로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릴 리가 만무한 공간. 우리의 말소리는 서로의 귀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고독한 미식가 동호회 사람들처럼 우리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열심히 껍데기를 집어 먹었다. 아아 껍데기는 가라, 대화를 방해하는 껍데기는 가라.. 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식당을 나왔더니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백에게 한강으로 가자고 말했고, 한강을 향해 한참을 걸었다.  


한강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삼겹살, 껍데기 말고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동생이랑은 얼마나 친한지, 아침형 인간인지, 야행성 인간인지, 뷔페가 좋은지, 레스토랑이 좋은지,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드는지, 원래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좋은지, 물어보고 싶어 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강에 도착한 백은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 먹자고 했다. 맥주? 맥주 하면 나는 아닌데? 소주 한잔에 오바이트 10번도 자신 있는 알코올 쓰레기였던 나였지만, 그날은 쿨하게 오케이! 를 외치고는 이슬톡톡*복숭아 맛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우리는 계단 위에 앉아 눈을감자를 안주삼아 알코올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백은 병맥주를, 나는 이슬 톡톡을 마시며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강의 여름밤을 즐겼다. 때마침 하늘 위에 걸린 달이 보였다.


"저기 저 달 진짜 이쁘지 않아요?"

"아,, 달.. 네."

"?? 지금 거짓말했죠? 별로 감흥이 없는 것 같은데?"

"아.. 사실 달을 보고 이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ㅎㅎ"


나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보름달, 반달, 초승달, 달의 아름다움에 감탄은 하지 못할 망정, 감자과자나 주어 먹고 있는 백이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감성이라고는 맞는 구석이 없지만, 그조차 귀여웠다. 그렇다. 역시 콩깍지가 제대로 씐 탓이었다.


나는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의 운전사처럼 나는 정신없이 백에게 직진하고 있었다. 늘 수동형으로 살아오며, 연애도 수동적으로 해왔었던 사람이 나였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만나자면 만나고, 시간 갖자고 하면 그러라 하고, 바람 좀 폈다고 하면 다시 붙잡기나하고, 뭐 그런... 그런 연애를 했었다면, 오늘의 나는 슈퍼 울트라급 강철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깨달음 없는 경험은 없다고, B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후로 나는 제대로 돌아버려서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새로운 연애를 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나는 새로운 내 모습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두 번째 만남 후, 월별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백과 연인이 되는 것. 블라우스에 진하게 베인 돼지껍데기 냄새를 킁킁대는데 카톡 진동이 울렸다. 백이었다.


"집 잘 도착하셨죠? 다음에는 어떤 걸 먹어볼까요?"

"닭발이요, 닭발. 저희 동네로 오세요. 닭발 쏩니다."




우리는 며칠 뒤, 닭발을 먹고 영화도 봤다. 공원을 걸었다. 핑크색 구름을 보면서 서로의 꿈 이야기를 했다. 또 한 번 한강을 갔다. 이번에는 맥주 대신 콜라를 마셨다. 취하지 않아도 재밌었다. 연락도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했고, 말을 놓으니 더 편해졌고, 그러니까 이쯤 되면 사귀어야 했지만, 백은 고백을 하지 않았다.


늘 헤어질 때면 "오늘도 재밌었어요" 혹은 "왜 이렇게 재밌을까요?"같은 말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슬슬 답답해졌다. 백에게 나는 무엇일까, 백에게 나는 재미를 주는 광대에 불과한 것인가. 벌써 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백에 대한 나의 마음은 선명해졌지만, 알다가도 모르겠는 백의 마음. 안 되겠다. 백이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백을 만난 2018년의 7월, 그날은 불쾌지수가 하늘을 뚫을만큼 무진장 더운 여름밤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자마자 두-근, 두-근 거리던 심장이 두두두두-두근 템포로 뛰었고, 모기에 물렸고, 겨드랑이에는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0.5배 재생속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백이 말했다.


"................., ......... 나를.."


나는 1.5배 속도로 되물었다.

"아니 내가 ,  뭐가 궁금한거야 뭔데."


"그러니까....혹시...너는 나를..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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