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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n 29. 2021

거슬리지 않는 마음, 그리고 고백

우리 조금만 더 가까워지자, 밤이 내리기전에(이고도-겨울밤)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됐다, 됐어. 나의 썸남, 백이 드디어 21일 하고도 4시간 만에 고백을 하려나보다. 우리는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도 가장 외진 벤치에 앉아있었다. 생전 처음 고백이란 것을 하게 될 백을 위한 나의 근사한 배려였다. 30분 동안 물린 모기만 벌써 네 방째. 하지만 그깟 모기쯤은 참을 수 있었다. 백의 입에서 곧 멋진 고백이 나올 테니까. 그러니까,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백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응?.. 아, 좋지. 좋아." 얼버무린 나의 대답에 후 우우 심호흡을 하는 백. 그래, 떨리겠지. 이제 고백해! 어서! 고백에 대한 답으로 어떤 멋진 말을 해주어야 할까 머릿속으로 멘트를 써 내려가고 있었는데, 백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아, 혹시 어떤 게 좋아?"

 

뭐라고? 어떤 게 좋은지 알아서 뭐하게. 그냥 나도 네가 좋으니까 사귀자고 해라, 라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백을 노려봤다. 그런 나를 웃으며 쳐다보는 그의 순진무구한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정성스러운 답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좋지. 일단 공대생인 것도 좋고, 처음 만났을 때 삼성 페이 쓴 것도 멋있었고(얼리어답터같은 느낌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가방 안 들고 온 것도 좋았고. 음 뭐랄까 자유로워 보인 달까? 음....... 거슬리는 것도 딱히 없고..”     


백의 얼굴이 살짝 찡그러지더니 이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네가 다정해서, 자상해서 좋아라는 말을 듣겠거니 한 백에게 나 또한 허튼소리를 한 셈이었지만, 백은 긴장이 풀린 듯 크게 입을 벌려가며 웃었다. 황당한 답일 수 있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삼성 페이를 쓰는 사람을 처음 만났고, (그 시절만 해도 정말 그랬다.) 가방 없이 경쾌하게 나를 만나러 오는 그의 몸짓, 손짓, 발짓, 밝은 웃음, 사실 모든 게 좋았으니까.

  

좋은 건 좋은 건데, 예상한 것보다 더 고구마 같은 전개에 마음속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시답잖은 대화로 시간을 밀어내다 보니, 어느새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엄마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기에 집에 안 들어오냐고 전화 오지, 친구들은 이제 1일이냐고 카톡 오지, 모기는 또 물렸지, 백은 갑자기 지난달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지, 정말 이제는 철수를 해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백의 고백 세포가 잠들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더 이상 끈적끈적한 벤치에 허벅지를 대고 앉아있을 수 없어, 몸을 벌떡 일으킨 내게 백이 말했다.     


"혹시 내가 집에 데려다줘도 돼?

"어?! 어! 어어어! 데려다줘! “     


우리는 개천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로변으로 걸을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백의 고백을 차 소음으로 듣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한 나의 섬세한 계획이었다. 빵빵대는 소리가 아닌,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가깝지 않지만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와 보폭을 유지하며 발을 맞추어 걷던 우리의 모습이 아스팔트 위에 길게 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백하기 딱 좋은 여름밤이었다.

냉큼 손을 잡고 나랑 사귀자라고 말을 뱉어볼까, 운동화 끈이 풀린 척 시간을 벌어볼까. 그럼직한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 윗머리가 보였고, 그 윗머리 위에는 둥근달이 하늘에 걸려있었다.


현관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어느새 빠른 걸음으로 백을 앞질러 걷고 있었다. 현관에 도착했다.


"나 이제 번호키 누르면 집에 들어간다? 이제 간다?? 진짜 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백의 입을 보자마자 나는 결심했다. 그래, 여자가 먼저 고백해도 되잖아, 뭐야, 나 지금까지 왜 기다리기만 한 거지? 해보자. 안 해봐서 어려운 거지, 별 거 아니야. 그래, 해보자!


- "저... “

"저기.. 혹시 거슬리는 게 없다면 나랑 만나볼래?"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백을 쳐다봤다. 백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웃을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 답하지 않으면 왈칵 울음을 쏟아버릴 것 같았기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좋아!"라고 외쳤고, 곧 몸에 열이 올랐다. 여름밤의 열대야 탓일 거라 생각해도, 그건 분명 다른 뜨거움이었다. 귀도 빨개진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포옹을 해야 하는 건지, 잘 만나보자며 악수를 해야 하는 것인지 머릿속이 엉키기 시작했다. 결국,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갑자기 달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우와 달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로 냅다 뛰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웬 시뻘건 홍당무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발개진 내 얼굴이었다.

"나 택시 타고 가고 있어, 우리 오늘부터 1 일인 거지? "



끈적끈적했던 여름을 함께 보내며 끈끈해진 우리.

뽀송뽀송해진 발바닥이 간지러워 잠을 잘 수 없었던 여름밤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슬리지 않는 서로의 손을 잡고, 벌써 네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날이 오면, 함께 갔던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세 시간 동안이나 앉아있던 벤치에 들러 서툴렀던 그때를 추억한다. 어떻게 고백을 하는데 거슬리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냐고 따지면, 갑자기 왜 달 사진을 찍고 도망갔냐고 되받으면서 투닥거리다 보면 마음이 뽀송뽀송해지고 만다.


그리고 이제 또 그날이 다가온다. 이번에는 끈적끈적해진 백의 손을 맞잡으며 쿨하게 가슴은 뜨겁게 고백을 날려버려야겠다.


 "나 너 (여전히) 좋아해!!!!!!!!!!!!!!!!!!!(물론) 삼성페이때문만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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