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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Apr 15. 2021

연인의 시간을 가지자는 말의 함정-하

나만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알았던 답, 그 정답의 흑역사가 생각났다.

<이어서>


"잘 지냈어?"

카톡을 보내자마자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뒤집었다. 카톡 알림 소리도 꺼버렸다. 그에게 답장이 오지 않을까 봐, 아니 올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고, "응, 잘 지냈지. 너는?"라는 서늘한 답이 와 있었다. 그것도 칼답이었다. 뭐지? 내 연락만 기다린 건가? 하지만 친구사이에서도 칼답은 할 수 있는 거니까. 큰 의의를 두지 않고 나는 본론을 말했다.



"아니, 잠깐 만나서 말하면 좋을 거 같아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

"음, 일요일 오전에 잠깐 괜찮아. 내가 네 쪽으로 갈게."


직접 온다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희망을 가졌다. 그래, 너도 결국 시간을 가져보니 안 되겠다 싶었지? 후후. 설렘 반, 떨림반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밀어내며 지냈다. 그리고 일요일, 그는 정말 우리 집 앞에 왔고 2주 만에 그를 만났다. 나는 그의 차에 타자마자 무거운 공기를 맡았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직감이 왔다. 그래서 곧장 본론을 말했다.


"아니, 나는 모든 시간이 다 좋을 수 없다 생각해.. 계절도 사계절이 있는데.. 춥다가도 따뜻해지고, 우리도 안 좋았다가 다시 좋아지고... 우리도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음. 아니.."


어젯밤 침대에 누워 메모장에 구구절절 쓴 이야기가 1/3도 끝나지 않던 차, B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 화가 났다. 2주 동안 나의 잘못을 나노 단위로 되짚어가며 뼈저리게 반성하고, 혹시 나의 툭 뱉은 말에 그가 상처를 받았을까 봐 미안하고, 결국에는 나의 문제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생각하며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울고 또 울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래서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입모양을 보자마자 지난 2주간의 설움과 아픔이 다시 몰아쳐왔다. 뭐?? 그렇게 우아하게 고개를 내저으면 다야??라는 말은 물론 하지 않았다. 욕이 나올 것 같아서 급하게 차에서 내리자, 그는 천천히 창문을 내리며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났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혼자 남겨진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 두 다리가 용했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관계 개선을 하고 싶어서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잘해보고 싶다면 이렇게 매몰차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도 내가 불쌍했는지, 며칠 뒤 그에게 다시 잘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아 눈물의 재회를 했다.



나만 빼고 알았던 답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둘 분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야 가질 수는 있는데 어떻게 세 달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몇몇 친구들은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며 위로를 했다. 뼈 때리는 조언에 쉽게 풀이 죽었다가 그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갈망은 <지식인>에 글을 쓰게 만들었다. 조금의 거짓말을 보태어 답정너의 마음으로 올렸던 글에는 이런 답이 달렸다.


답변자) 구 남친은 아직 마음이 있어 보이네요.......그런데 다시 만난 다고 해도 언제나 헤어짐의 이유는 똑같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와 시간을 가지기 며칠 전부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나는 전쟁이었는데 그는 사랑을 시작했다. 이거야말로 사랑과 전쟁 아닌가? 하하하하.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난 뒤  불행이 모조리 내게 몰빵 된 듯한 시간을 겪었다. 친구들과 지식인의 말이 맞았다.


나만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알았던 답, 그 정답의 흑역사가 생각났다. 당장 인터넷에서 그 썩은 감정을 지워버려야 했다. 그런데 그날 처음 알았다. 지식인에 남긴 질문은 절대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지울 수는 있지만 답변이 달리지 않은 글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또한 글을 숨기고 싶다면 내공을 300점이나 깎고 나서야 비공개로 돌릴 수 있었다. 배신에 마음은 깎일 대로 깎였는데 이제 내공도 깎으라는 이 친절하고 아름다운 세상. 하지만, 내공을 깎는 아픔쯤이야 내가 그동안 받은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뼈와 내공을 깎는 고통을 통해 소중한 경험치를 얻었다. 그러니까 똑똑한 지식인들의 답변과 나의 경험을 비롯해 추론한 그의 시간을 갖자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영화조금만더가까이중에서

시간을 갖자, 한 3개월 정도?

(음, 우리 시간을 갖자. 시간을 갖자는 말이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야. 근데 또 안 헤어지자는 말도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지금은 너랑 헤어지고 싶지는 않은데, 그 여자도 만나고 싶거든? 일단 그 여자도 한번 만나봐야 내가 진짜 누구를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 테니까 나한테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 일주일? 아니 그건 너무 짧고, 한 달? 음 그것도 아니고. 세 달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세 달 동안 걔랑 만나보고 만약 네가 더 좋다면 다시 너한테 돌아올 테니까 너는 공부나 잘하고 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가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야. 알지?")


정리해보자면 그는 일종의 회피를 할 작정으로 세 달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물론 연인 사이에 시간이 필요한 경우는 존재한다. 시간을 갖고 더 좋은 관계가 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위 경우처럼, 일반적인 기간(일주일, 최대 한 달) 이상의 시간을 제시한다면 그건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무책임하고 뻔뻔한 그런 놈에게 쥐어 줄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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