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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l 13. 2021

네가 나를 좋아하는 단 한 가지 이유

그는 오늘도 웃는다. 큐 싸인이 없어도 웃는다.

몇 년 전, 서울의 대형서점에 방문했을 때였다. 서점 앞, 커다란 기둥 뒤에 서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그들의 엉거주춤한 몸사위는 마치 서있다기보다는 숨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말소리가 들렸다. "큐, 들어가." 아, 독립영화라도 만드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카메라는 어딨지? 설마 나도 지나가는 행인 1로 나오는 거 아니야? 생각하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큐사인을 받은 그 남자였다.


"저....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네?"


뭐야, 이거 연기인가? 몰래카메라? 큐 싸인이 바로 이런 거였어? 하고 고개를 미친 사람처럼 휘휘 저으며 카메라를 찾고 있는 내게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제 스타일이셔 가지고요."

아뿔싸. 드디어 27년 인생사 처음으로 처음 본 남자에게 연락처를 줄 수 있는 날이 도래했구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자기 스타일이라니, 이것은 운명일세! 하고 전화번호를 찍어줘야겠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1%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가시라고요, 저기 뒤에서 큐사인 보낸 거 다 봤다고요."라고 하려다가, 그래도 초면에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혹시 어디 사세요?"라고 묻길래  "부산 살아요."라고 했더니, "부산이요? 사투리 안 쓰시는데?"라고 하기에  "아 들켰네." 혼잣말을 하고는 서점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서점을 구경하고, 책을 사서 나오는 길에도 그들은 여전히 큐! 큐! 를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연기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젊은이들이기를 바라며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머릿속에 보관해두었던 낡은 서랍들을 하나 둘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간 지나간 사람들을 생각해봤다. 지나가고 스쳐간 남자가 몇 명 없기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내가 최초로 고백을 받은 건 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적극적이었다. 메일 닉네임을 "프리 사랑"으로 바꾸고, "한평생 프리만을 사랑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라는 서명글을 자랑스레 달아두었던, 사랑에 조심성이 없던 초딩이 바로 그였다.


그가 내게 반지를 내민 건, 여름방학이 오기 며칠 전. 아무도 없는 복도 구석에서 그가 내게 고백했다. "받아줘, 내일 끼고 오면 네가 내 여자 친구라고 생각할게. 만약 끼기 싫다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실내화 주머니를 휘휘 저으며 쏜살같이 운동장으로 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본 고백이 무섭고, 당혹스러웠다. 나도 그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반지까지 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하고 막힌 탓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 고백 한 그 아이의 진심을 모른 채 할 수 없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네가 나를 왜 좋아하는지 궁금해, 그걸 답장으로 보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얼마 뒤 답장이 왔다. "네가 목이 길어서 좋아, 키도 커서 좋고." 아니 그러니까, 내가 기린 같아서 좋다는 거야?라고 보내려다가 답장을 보내지도, 반지를 끼지도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훅훅 흘렀다. 두 번째 고백은 무려 7년이 흐른 20살 때였다. 그는 문자로 고백을 했다.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좋다는 그의 말에 당혹스러웠던 나는 용기를 내어 만나자고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아니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그는 평소 같지 않은 수줍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수능 끝나고, 교실에서 침묵의 공공칠빵 했던 거 기억나? 그때 네가 계속 걸렸잖아....... 이빨이 보여서. 계속 걸려서 인디언밥을 맞는데도 또 걸리고, 또 웃고, 또 걸리는 게..... 너무 귀여워 보여서.. 그때부터였어..".


수줍게 이빨을 드러내며 마음을 전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작은 입에 비해 큰 이빨을 손으로 가린 채 깔깔대고 웃었다. 침묵의 공공칠빵을 좋아하던 그는 1년 뒤 군대에 갔다.


그 후, 몇 번의 고백을 받았는데 대부분 비슷한 이유였다. 웃겨서, 재밌어서, 4차원 같아서, 가장 히트는 자유로운 영혼 같아서 라는 말이었는데, 한 번은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네가 웃기고, 재밌고, 쿨해서 만나고 싶었는데 이상해. 오히려 사귀니까 별로 안 웃겨. 아, 재미없다는 소리는 아니고."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그와 사귈수록 노잼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분명 느꼈다. 말장난을 치는 게 나의 일과 중 하나인데, 그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나는 장난을 그만두었고, 시들시들한 반응에 나의 드립 실력은 점차 메말라갔다. 그때는 몰랐다.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또 한 번 내가 좋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또 한 번 물었다.


"내가 왜 좋아? 아니 언제부터 좋아졌어? "

그는 말했다.

"잘 웃어서 좋았어, 웃는 모습이 이뻐서. 나도 같이 웃게 되니까 너무 좋잖아." 웃는 모습이 이쁘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 말이라, 그의 진심이 진실된 것인지 의아했으나, 생각해보니 잘 웃기는 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를 만나는 내내 나는 그를 웃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매번 배꼽을 잡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안 웃긴데 웃지 말라고 하니, 그는 웃기지 말라며 또 웃었다. 그는 오늘도 웃는다. 본인의 웃음이 내 덕분이라고 말해주는 그가 있어 나도 열심히 웃는다. 사람 속을 뒤집어놓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방으로 들어가 씩씩대다가도, 양말을 뒤집어놓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다가도, 갑자기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는다. "이제 둘이 맘껏 웃어! 막 깔깔대고 웃는 거야, 오키? 큐!"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데도 큰 이빨을 드러내며 우하하 웃는다.


나도 그가 좋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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