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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l 20. 2021

트라우마를 안은 채 연애를 한다는 것

그놈에게 뺨 맞고, 그에게 화풀이했음을 인정한다.

매번 만나는 남자들 마다 불행을 던지고 도망갔다. 먼저 좋다고 고백할 때는 언제고, 마음을 내어주니 이제는 내가 지겹다고 뒤통수를 때린 것이었다. 나는 떠나는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노력해봐, 아니 내가 노력할게. 그럼 너도 분명 내가 다시 좋아질 거야."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 그들이 내게 남겨준 것은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추억이 아니라, 생각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악몽이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여자의 촉을 무시하면  되는 이유를 알았고, 바람피우는 증거를 알아내는 방법, 바람피우는 남자들의 습관과 같은 것들을 터득했다.

나는 오래도록 트라우마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발을 휘휘 저으며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아도 나는 또다시 그곳에 갇혔다. 이런 내가 다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는 친구들의 조언은 정말 맞는 걸까? 그럴 리 없어. 또 한 번 상처 받느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인연은 갑자기 내게 찾아왔다.


지하철의 퀴퀴한 냄새에서 그와 함께 걸었던 한강의 물비린내를 맡았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재생됐다. 하루 종일, 아주 온종일 내 머릿속에서 걸어 다니는 그를 붙잡느라 넋을 잃고 살았던 그해 여름, 그는 빠르게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침대에 누워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쿵쿵 뛰던 가슴에 무거운 돌멩이가 툭 하고 던져졌다. 그와 사귄 지 2주도 안 됐을 때였다. 항상 전화가 오던 시각에 전화가 오지 않았을 때, 카톡 답장이 평소보다 조금 늘어질 때와 같은 아주 사소한 순간,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나는 금방 초조해졌다. 곧장 과거의 그들이 저질렀던 악몽 같은 일들이 떠올랐다. 내 연락은 못 본 체하고, 다른 여자와 썸을 타던 그들의 행동과 같은 일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에게 욱하고 말았다. 고작 2분 전화를 늦게 하고, 고작 5분 정도 답장을 하지 못한 그를 붙잡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정말 그가 나를 떠나버려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쉽게 욱하고, 짜증을 내면서 울어버리기까지 하는 연인을 언제까지 바다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줄 수 있을까? 나라면? 나라면 당장 손절. 이러다가는 정말 그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냈다. 오늘은 그에게 솔직한 마음을 말해보기로.


만나자마자 샤부샤부를 먹었다. 샤부샤부는 고기가 빨리 익으니 진지하게 얘기할 시간이 부족했다. 패스. 카페에 갔다. 그날따라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다. 어느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 모르니, 이곳도 패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그에게 마트에 가자고 했다. 살 것도 없으면서 괜히 과자 몇 봉지와 생수를 집어 들었다. 걸어 다니면서 말하기에는 애매하니까, 패스. 과자봉지를 품에 안고 마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맨 나는, 시동이 켜지기 전에 그에게 말했다.


"저기, 내가 할 말이 있어."


그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돌려 앉았다. "뭔데? 뭔데?" 분위기에 맞지 않은 그의 발랄한 목소리에 풋 하고 웃음이 났다가, 마음속의 돌멩이를 생각하니 툭하고 눈물이 났다.


"미안해, 미안해. 그냥 울어서 미안해."


입이 덜덜 떨렸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런 놈들을 만난 것조차 내 잘못이라 여겼던 때였다. 내가 눈물로 몸의 수분을 빼내면, 그는 생수로 수분을 보충하라며 엉엉 우는 내 입에 생수병을 물렸다. 차가운 물을 마시니 정신이 조금 차려지는 것 같았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렇지만, 몇 번의 상처를 받은지라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겁부터 난다고, 또다시 내가 상처 받을까 봐 무섭다고. 이런 내가 이해가 안 가겠지만, 나도 이런 내가 너무 싫다고. 너를 좋아하는데 왜 과거의 상처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마트 주차장 구석에서 눈물, 콧물, 겨땀을 쓰리 콤보로 흘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속에 꽁꽁 쌓아두었던 돌멩이들이 조금은 무너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랬구나, 괜찮아. 그 사람들이랑 나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럴 일은 이제 없지."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은 '그놈'이고, 내게 사랑을 주고 있는 사람은 '그'라는 사실을 잊은 채, 그놈에게 풀지 못한 온갖 짜증과 울분을 그에게 폭주하던 과거의 나를 한대 치고 싶었다. 아니다, 스스로를 칠 수는 없지. 나는 납작해질 대로 납작해진 뒤통수를 쓰윽 쓰다듬으며 상처에 맞설 용기를 내고, 그놈들과 그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날 이후, 나는 새로운 기술을 체득했다. 그놈들의 악귀가 떠오르는 날에는 머릿속으로 컨트롤+X를 두드린다. 잘라내기, 잘라내기. 그리고 그 위에는 그와 함께 한 추억을 붙여 넣으면 끝. 흐린 기억을 쫓아내고, 맑은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은 그가 내게 알려준, 알면 알수록 쓸모 있는 신비한 연애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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