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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l 30. 2021

차여보니 할 수 있는 많은 것들

감사합니다. 그때 저를 그렇고 그렇게 차 주셔서!

차이기 전에는 몰랐다. 이별이 이렇게 힘든 줄은.

똥을 싸고 도망간 놈들의 뒤처리는 안타깝게도 내 몫이었다. 아, 분하다. 분해. 차인 것도 분해 죽겠는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련 범벅인 채로 과거를 되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새벽에 잠드는 것뿐이라니. 하지만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웃을 수 있었고, 조금씩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결국에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그의 콧구멍이 컸는지 작았는지, 무슨 향이 났는지, 내게 뭐라고 씨부렸는지 등등이 모두 기억이 나지 않는 기억 제로상태, 즉 내 인생에서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


다시는 이성교제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나는 정신 차려보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턱시도를 입은 남자 옆에 서 있었다. 남편이었다. 내가 밀어붙인 결혼이었지만 얼떨떨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침대에 누워 식음전폐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행복하게 웃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놀라움을 함께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를 통해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나는 아웃백 대기의자에 앉아서 메일을 확인했다. 제안의 내용은 이랬다. 연애상담 어플에서 조언자의 역할을 해달라는 것. 내게 제안이 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선뜻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웃백의 대기의자는 곧 생각하는 의자로 변했다.

"내가 뭐라고..." 함정에 빠졌다. 아니 빠졌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나는 연애 경험이 총 3번뿐이고, 그것도 2번은 바람, 유흥 때문에 헤어졌는데, 내가 어떻게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지?


상상을 해보자. 내가 만약 엑셀을 잘하고 싶어서 학원에 갔어. 근데 선생님이 나보다 엑셀 경험이 없어. 그런데 잘한대. 자기한테 배워보래. 나는 선뜻 수강료를 지불할 수 있을까? 안돼에에에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이다. 이제는 연애상담이 끝난 후, "이 분은 정말 상담능력이 별로입니다. 꽝! 꽝!" 후기를 받으면 어떡하지?라는 망상에 이르렀다.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대기번호 34번 손님, 들어오세요.


망상에 망상을 더해 괴로움의 골짜기에 빠진 나를 구해준 직원의 도움으로 생각을 잠시 멈췄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이런 걸 해도 될까? 아니 솔직히 해보고 싶기는 한데, 근데 내가 뭐라고....... 음.. 내가 뭐라고 힘이 돼 줄 수 있을까? 아... 근데 해보고 싶긴 해.."


그가 포크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당연히 해도 되지. 그 사람들도 엄청난 심리상담을 원하는 게 아닐 거야. 그저 공감해주고 위로받길 원할 뿐이지.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어플을 통해 익명의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정말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그냥 프리는 열심히 들어주면 되지 않을까?"


아하, 그렇구나. 그런가?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다. 맞다. 내가 누구인가. 우리 집안에서 귀 얇은 사람의 고유명사로 불리는 사람 아닌가. 팔랑귀를 펄럭이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연애상담 어플 <윌슨>에서 윌스너로 활동한 지 어느새 8개월. 이렇게 시간이 빠를 수 없다. 그 사이 나는 서른 명의 고민자들을 만났다. 처음 활동할 때 놀랐던 점은, 이렇게나 많은 요청이 들어온 다는 것이었다. 상담 건당으로 내게 돈이 입금되기 때문에, 제안들이 어찌 보면 기회였지만, 많이 힘들어하는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슬펐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지 너무 잘 알기에.


첫 상담을 했던 날은 여전히 생경하다. 피자를 먹으려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실수로 버튼을 누른 바람에 진행되었던 상담. "어떡해! 어떡해!" 비명을 지르며 피자를 들고 날뛰다 기름진 손을 닦고 소파에 앉았다. 나는 사연을 들으며 과거 경험이 떠올라 화가 나기도 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친구들에도 하지 못할 말을 내게 쏟아내는 사연의 한 줄, 한 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30분, 50분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완벽한 해결책을 줄 수 없다. 거기다 연애 문제는 당사자들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라 더더욱 그렇다. 초반에는 해결책을 제시해주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힘들었는데, 어느 날 한분이 남겨주신 후기 덕에 무거운 압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김 프리님과 상담한 후 저의 고민이 95%는 해결되었어요. 나머지 5%는 저한테 달렸죠."


나는 100%의 해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95% 정도의 마음을 나누는 공감 요정이 되기로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심리학 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했다. 내 선에서 가능한, 일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나누기로.


중요한 것은 공감이었다.


때때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을 만날 때면, 나의 경험을 고백했다. 때로는 "힘내세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라는 말보다는, "아 그러니까요, 저도 그런 놈한테 당해봤는데, 아 제가 또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아니 글쎄 제가 2년 전에..."라는 경험에 기반한 공감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서슴없이 나의 흑역사의 끝장판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나 또한 친구들에게 쪽팔려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분들에게는 거침없이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 심지어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런 고생을 하셨냐고, 정말 힘드셨겠다고. 나의 경험을 나누니, 조금 더 빠르게 마음의 문을 연 채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을. 나는 바람과, 유흥에 찌든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진실된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고민을 이미 해본 사람으로서,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며칠 전, 대학 선배에게 카톡이 왔다. 요즘 무얼 하고 지내냐는 말에 그냥 이것저것이라고 했더니, 이것이 뭔지 캐물기에, 연애상담 어플이란 것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나의 모든 연애사를 2열쯤에서 지켜본 선배가 말했다.


"우와 너 연애 별로 못해봤잖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답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게 경험이 되더라. 다 이상하게 차였잖아."

"개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공감돼서 좋대. 역시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어."


차이기 전에는 몰랐다. 차여보니   있는 일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추상적인 위로 대신 구체적인 공감과 마음을 나눌  있게  지금의 내가 좋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유주얼 서스펙트급의 반전과 소름 끼치는 짓으로 이별을 선물해주신 모든 분들( ) 꿈에서 뵙게 된다면 이렇게 말할 테다. 그때 저를 그렇고 그렇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테니, 이건 정말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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