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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May 20. 2021

어제는 글 쓰고, 오늘은 공장에 가고

5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티브이에서는 이번 여름에 역대급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거라고 잔뜩 겁을 주고 있었고, 언제나 눈치 없는 내 통장은 잔고가 없다고 떠들어댔다. 식은땀이 났다. 유튜브 작가와 상품등록 일을 하면서 소소하게 용돈벌이(대략 80만 원)를 하고 있어 안심하며 지냈었지만, 포카칩을 먹다가 뜬금없이 치아가 부러졌다.


그러니까 치과치료까지 받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이고, 치과라니. 그곳은 아픔보다 돈이 무서운 곳 아닌가. 물론, 남편의 월급으로 치료비를 메꿀 수야 있겠지만, 이 정도는 온 힘을 다해 처리해보고 싶은 비장한 마음이 들었고, 곧장 침대에 누워 알바몬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CD 앨범 포장은 아침 6시 30분에 버스 타고 경기북부까지 가야 해서, 해보고 싶었던 케이크 공장 알바는 단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포기했다. 단기 알바라고 해도 나의 기질과 체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는 마음으로 새로고침을 눌렀던 바로 그때, 소심한 두더지가 고개를 내밀 듯 갑자기 뾰오오옹 하고 나타난 공고. 공고내용은 이러했다.


[쉬운 알바/라벨 부착 알바/여자 모집(이틀 근무)]


쉬운 알바라는 카피에서 나는 마음을 홀라당 뺏겼다. 1분 만에 공고내용을 파악하고, 알바 지원에 성공했다. [이름/나이/사는 곳/치약 스티커 라벨]이라고 깔끔하게 문자로 보내면 끝!


정확히 5분 만에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고, 궁금한 거 있냐길래 그런 거 없다고 했더니 내일 보자며 끊었다. 그렇게 나는 내일부터 동네 공장으로 라벨을 붙이러 나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라 그런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걱정이 되어서인지 그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day1. 라벨은 처음이라>

단 이틀 출근이지만, 출근은 출근이었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로 들어가 있으면 불안해하는 극 내향성 인간이지만, 아침부터 일한다고 설렌나머지 쓸데없이 20분이나 일찍 온 바람에 주변 편의점에 들어가 꿀단지 초콜릿 우유를 먹었다. 치료해야 할 치아가 시큰하게 느껴졌다. 그래, 벌자. 벌어서 치과 가자!


8시 20분, 회사 건물 입구에 모인 사람들. 역시 모두 여자였다. 족히 10명은 되어 보였다. 담당자를 따라 줄줄줄 따라 들어간 작업실, 기계의 굉음소리와 바삐 움직이는 발소리에 위축되어 어안이 벙벙하던 그때, 작업대 위로 위생모와 장갑이 툭하고 던져졌다. 모두들 말없이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작업대 앞에서 작업설명을 들었다. 작업은 수입 치약 위에 한글로 된 라벨을 붙이는 일이었다.


8시 30분, “자, 이제 시작합시다.” 처음엔 재밌었다. 치약 이름부터 성분 그리고 주의사항까지 인쇄된 스티커 내용이 꼭 이 치약은 중국 ㅇㅇ에서 시작된 행운의 치약으로... 같이 꼭 행운의 편지 같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중요한 스티커였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뜨거운 소명감의 씨앗을 불태운 나는, 스티커를 제대로, 이쁘게, 방향에 맞게 잘 붙이기 위해 온 집중을 다하기 시작했다. 스티커 접착면이 촤르르 하고 붙여질 때의 쾌감을 정신없이 느끼던 그때, 다시 한번 큰 소리가 들렸다.


“잠깐 쉬었다 합시다!”


반장님은 10분간 쉬면 된다고 했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10시 39분까지 다시 오세요.” 속으로 솔직히 너무하다 싶었다. '10분 쉬고 옵시다'와 '39분 까지 오세요'는 분명 다르지 않은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인데, 너무하다고 투정 부릴 시간도 아까운 그곳에서는 반장님의 말이 곧 법이었다. 자연스레 작업실 입구 쪽에 비치된 정수기로 사람들이 모였고, 덩달아 줄을 섰다.  


물 한번 마시는데도 이렇게 힘들구나, 싶은 생각을 하다 보니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물을 먹자마자 나는 마치 10년 만에 새로운 안경을 맞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세상이 맑아 보이고, 밝아 보이는지 그전에는 몰랐었는데.. 그 순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광명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라고 존댓말이 나올 정도로 정말 경이로웠다.


줄 서는데 2분, 마시는데 1분, 또 한 번 마시는데 2분, 남편에게 “여기 물 맛집이야.”라고 카톡 보내는데 1분. 시간은 초고속으로 흘렀다. 어느새 39분이 되었고, 우리는 반장님 앞에 다시 모였다. 또 한 번, 라벨을 붙였고, 붙였고, 붙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 점심은 근처 한식뷔페식당에서 먹었다. 아르바이트생 10명이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아무도 어느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일만 보면 안 볼 사람들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숟가락 들 힘 정도만 남아있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된 그때는, 일을 한지 고작 4시간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대로변을 쌩쌩 달리는 버스를 봤다. 하필이면 우리 집 가는 버스였고, 나도 모르게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놓은 버스카드를 만지작만지작 거렸고, 홀린 듯이 버스정류장 근처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고, 집에 가고 싶던 마음을 붙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작업장으로 몸을 이끌었다. 세상 가장 느린 걸음으로, 세상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그곳으로. 터벅, 터어어어벅.


작업실로 들어가자마자 형광등이 하나둘 켜졌고, 반장님이 기다렸다는 듯 경쾌한 총성을 울렸다.

"시작합시다, 시작이요"

흰 벽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정확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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