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니 Jun 04. 2021

입사지원은 무려 무료입니다, 고객님

주사위도 던져야 굴러가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영화광입니다. 영화를 보기에 좋은 날은 없습니다. 날이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저는 늘 영화를 보곤 합니다......(중략) 기본적인 컷 편집은 매끄럽게 작업할 수 있으며, 어떤 부분을 컷 하고, 어떤 부분을 살려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유튜브 영화 리뷰 편집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자마자 거짓부렁의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영화광이라고? 그것 참 웃긴 말이다. 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세기의 명작 트루먼쇼를 몇 달 전에 처음 봤고, 타이타닉도 남편과 결혼한 후 처음 봤다.


그렇다고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문제는 본 영화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그러니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편집기술도 거짓말이다. 기본적인 컷 편집은 가능하지만, 매끄럽게 작업 해 본적은 딱히 없다. 프리미어 프로로 편집해 본 것이라고는 신혼여행 <발리> 여행 영상이 전부였다. 하하. 하지만 딱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어떤 부분을 컷 하고, 어떤 부분을 살려내야 할지에 대한 감은 왠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건 자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20부작의 겨울연가를 한컷, 한컷 잘라내어 캡처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반응도 좋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렇게 웃기게 게시글을 만들어주셨냐며 칭찬해주는 댓글도 받았었다.(상업적 이용 X)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아무도 모르게, 너무 자연스럽게 헤비업로더가 되어갔다.


그 후에도 여러 드라마나 영화를 컷한 편집본으로 글을 연재해나갔다. 놀이터에 나가서 흙을 파는 게 여러모로 나은 편일 수도 있는, 아무 실도 득도 돈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던 그 일을 통해 나도 모르게 자신감을 얻은탓일까. 정말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그러니까 이제 입사지원 버튼만 누르면 !인데 차마 손끝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눌러! 눌러!  외쳤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과연 내가 될까? 내가 컷 편집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 내가 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닌데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 것부터 면접에서 들키지 않을까? > 등의 생각과 걱정 때문이었는데, 가장 큰 두려움은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때마침 남편이 돌아왔고, 주저리주저리 불편한 마음을 털어놨다. 곧 남편이 말했다.



입사지원은 무료입니다, 고객님

"그게 왜? 왜? 아니 도대체 왜? 입사 지원한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안 해? 다음일은 그다음에 생각해야지. 닥치면 다 할 수 있는 거 알잖아?.....(잔소리 중략) 프리는 왜 맨날 잘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해. 프리와 함께 일하고 싶은지 아닌지는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일단 이력서를 던져야 보기라도 하잖아."


@unplash/JP Valery

맞다. 입사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자기 피알 시스템이다. 그것도 무려 무료! 무료쿠폰, 무료 나눔에는 눈을 부릅뜨면서 돈 안 드는 입사지원을 왜 망설였는가. 나를 붙이든, 거르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나는 우선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야 굴러가는 건데.


온몸의 기운을 모아 입사지원에 성공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저녁으로 먹은 제육볶음이 벌써 소화가 다 되어 가벼워진 몸이 하늘로 날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 일단 뭐라도 던졌으니 뭐라도 되겠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입사지원은 굉장히 고고하고 우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희는 이런, 이런 분을 모셔요.라고 회사님들이 말씀하시는데, 이런, 이런 분이 아닌 내가 지원하는 것은 그쪽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괜히 말도 안 되는 스펙, 경력으로 인사담당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오히려 더 안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지라는 과한 걱정. 과연 걱정과 근심의 아이콘다운 생각이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참 웃긴 일이라며 고개를 절로 저었다.



"부르르르르르"

치과 예약 문자 아니면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입사지원을 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안녕하세요. XXX 인사담당자입니다. 혹시 가볍게 영화 리뷰 원고를 (사진+자막) 형태로 받아볼 수 있을까요?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아직 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사위 6에 가까운 결과 값이 나온 것 같아서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 당장 어떤 영화를 리뷰할 지부터가 막막했다. 당연히 나의 실력을 검증하는 단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당장, 곧바로 일 줄은 몰랐는데...


아아, 나는 이렇게 무료 입사지원에 눈이 멀어 영화광도, 편집 실력도 괜찮지않은 거짓부렁 쟁이로 몰락하고 말 것인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열심히, 온 힘을 다해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데구르르르르.... 좌로,우로 굴러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구를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구르는 것이야말로 구직자의 본분을 지키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하며 구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