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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n 25. 2021

회피형이 다시 회사에 들어간 이유

회피형: 회사기피유형

돈벌레가 이렇게 징그러운 줄 몰랐다. 2020년 6월 10일, 거실에서 돈벌레를 봤다. 손과 발이 벌벌 떨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생애 최초 돈벌레였다. 극심한 공포심에 하던 일을 팽개치고, 양말도 신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친정집으로 뛰었다. 엄마는 대낮에 연락도 없이 온 나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 돈벌레를 본 사람처럼. 그런 엄마에게 찍어둔 벌레 사진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고작 개미 정도를 본 듯, 전혀 놀랍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돈벌레잖아. 너 돈 많이 벌겠다?.

그리고 얘네 해충 아니야, 익충이야."

이상하다, 내가 돈을 많이 벌 방법이 없는데? 영화 리뷰도 한편당 10만 원 정도이니 한 달에 4번을 해도 40이고, 다른 알바 합쳐봐야 150이 조금 넘을 텐데. 아! 내 인생에 큰돈은 150만 원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니까 푼돈이라 생각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돈벌레님의 말씀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원래 돈 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 야망가 아닌가.



그런데 며칠 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려운 영화 리뷰를 잘해주셔서, 유튜브 채널 콘티, 에디터로 제안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영화 리뷰 업체의 대표님이었고, 새로운 업무를 제안하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대표님의 제안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재택근무가 아닌, 내근을 해야 한다는 것. 그곳은 우리 집에서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이상이나 걸리는, 한강을 건너도 통 가까워지지 않는 곳이었다. 과거 지하철 출퇴근의 악몽이 떠오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혹시 재택근무로는 안 될까요?.

제안은 감사한데, 거리가 걱정되어서요]



입사 제안을 재택 제안으로 되받아친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전해 들은 친구는, 당장 기회를 붙잡아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냐며 혼을 내기 시작했다. 맞다. 나에게는 간절함이 없었다. 돈도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지금 하는 일만 해도 될 것 같고, 굳이 회사를 다닐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에디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다시 새로운 회사에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곳은 유튜브 채널을 10여 개 운영하는 회사였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콘티는 뭐고 에디터는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찾아온 기회는, 그날의 돈벌레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별안간 나타난 돈벌레처럼, 기회도 난데없이 찾아온 것이다.


돈벌레 같은 일


난 정말 웃기게도, 돈벌레가 익충이라는 사실만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생긴 것만 보면 해충의 우두머리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이로운 벌레라니.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게 되는 일,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일, 그러니까 제안받은 이 일도 고작 돈벌레 같은 일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달받은 공고내용을 찬찬히 살피며, 해당 채널들의 방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배울 것도 많고, 무엇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공고를 보기전에는, 막연한 공포에 질려있었지만 들여다보니 또 별일은 아닌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원 버튼을 눌렀을 뿐이고, 며칠 뒤 7월 둘째 주부터 출근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해보지 않은 일, 경험하지 않은 일에는 쉽게 움츠려 들고 회피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안받은 일에 지레 겁먹고 달아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 기회를 잡기로 했다.


내게 이로운 일인지, 해로운 일인지는 해봐야 아는 거니까.


그렇게 나는 돈벌레의 도움?으로 생각지 못한 출발선에 발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새로운 일을 대할 때 돈벌레 보듯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움츠린 어깨가 시원하게 쫙 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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