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 원고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그러니까 반나절만에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있습니다가 새겨진 합격 목걸이를 받았다. 1차,2차,3차 거기다 등산면접까지 옵션으로 붙는 세상에서, 이곳이야말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걸맞은 21세기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조금 헷갈렸다.
<합격>이라는 단어 대신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이, <면접> 대신 <미팅>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진짜 내가 됐다는 건가? 면접 말고 미팅? 미팅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옷은 차려입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합격과 불합격으로 성패가 극명하게 나뉘는 면접 시장에서, 위 문장은 꽤나 애매한 표현이었기에, 나는 끝끝내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미팅 갔더니 사실은 면접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할 것 같아서. (남의 말을 잘 믿지 않는 편) 남편은 그렇게 헷갈리면, 직접 물어보라고 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남을 말을 잘 듣지 않는 편)
이게 정말 의례적인 미팅인 건지, 면접인지 감이 오지 않던 나는 결국 차 안 차(차린 듯 안 차려입은 듯) 스타일로 집을 나섰다. 살색 반팔 니트에 검은 슬랙스, 그리고 검은 단화에 검은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쳤다. 이 정도면 프리 해 보이기도 하면서, 격식을 놓지 않은 미팅 룩이라 생각하면서.
무척이나 더운 6월의 여름, 오후 2시. 나는 한강을 건너고 또 건너 무려 1시간 30분을 지하철에서 보낸 뒤에야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담당자 셋, 그리고 나. 가왕이 복면을 벗듯 잠시 마스크를 내려 수줍게 인사를 나눈 뒤, 미팅인지 면접인지를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스크린으로 영화 리뷰 영상을 함께 보면서, 컷 편집할 때 주의사항 등을 전달받았다. 아, 이것은 정말 미팅이구나! 영화 리뷰는 아무래도 저작권이 가장 민감한 부분이라, 그 부분에 유의해주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업무는 구글 드라이브 공유를 통해 전달받아 진행될 거라 했고, 영상은 일단 일주일에 하나, 익숙해지면 점차 늘리는 것으로 하자고 했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샀는데 딸기가 안 보이고, 김밥에 단무지가 없는 느낌이랄까? 처음 보는 자리이니, 어느 정도 기본적인 질문은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없었던 것이다.
아, 지금 나이가 30대 초반이신데 이 일을 메인으로 하실 생각이세요? 혹시 본업도 있으신 건 아니죠? 정도의 질문은 받아 줄 각오는 되어있었는데 그마저도 묻지 않았다. 내가 몇 살인지, 그전의 일은 왜 그만두었는지, 왜 다른 길을 가려고 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는지, 아이를 가지면 그만둘 것인지 등의 질문 또한 들을 수 없었다.
남편 내조에 힘 쏟아보세요, 남편이 큰돈 벌어오기를 바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개떡 같은 말을 들었을 때는 펑펑 울면서, 올바른 면접관의 자세는 무엇일까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하기도 했었고, 다음에도 이런 무례한 질문을 들으면 아가리 엎어치기로 면접관의 코를 확 납작하게 해 줘야지라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었던 탓인지, 나는 그들의 입에서 쉰내 나는 질문이 언제쯤 나오나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영화 리뷰 편집자에 걸맞은 여성일 뿐,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아무리 재택 프리랜서라지만, 이렇게 나를 믿고 뽑아도 되는 거냐며, 후회하지 않으시겠냐고 물어볼 뻔도 했지만, 짬바가 있으시니 누추함 속에서 빛나는 가능성을 보신 거겠지, 라는 생각으로 나대지 않았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돌림노래로 4절에, 6절까지 듣고 나서야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남편에게 미팅 한줄평을 보냈다.
"갑과 을이 아닌, 고용주와 근로자의 건설적이고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며칠 뒤, 나의 첫 영화가 배정되었다. 무탈하게 영화 리뷰의 편집자로 무난한 데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슬슬 인생이 재밌어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을 이렇게 쉽게 시작할 수 있다니, 지원자가 꽤나 많았는데 내가 선택을 받았다니, 나는 정말 나조차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호호. 호호 아줌마처럼 호호호호호 웃으며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매끄러운 편집장인만 되면 일사천리다,라고 생각하며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나는 곧 자신감을 잃어갔다. 편집은 뚝딱 키보드질 한 번으로 대충 만들어지지 않는 고난도 기술이었던 것을 망각한 채, 잘할 수 있다며 떵떵거린 과거의 나를 만나면 쌍절곤을 휘두르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별 경력 없는 나를 믿고, 기회를 준 심사위원들을 생각하면 다시금 힘을 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포기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 더 이상은 못해먹겠어요, 죄송합니다. 저를 뽑으신 이유가 있으셨군요. 이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에요."라는 카톡을 보낼까 말까 망설였고, 몇 번이고 말도 안 되는 헛발질을 했다. 영상을 날려먹기도 하고, 80% 완성한 영상을 다시 밀어버리기도 하고, 완성한 영상물이 저작권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몇 번이고 수정에 수정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고, 결국 13분짜리 완성품이 성공적으로 납품되었다.
고용자와 근로자의 건설적이고 아름다운 만남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역시나 시간은 맹렬하게 흐르고 있었다.
19금 원고+쿠팡 상품등록 업무에 영화 편집 리뷰까지 추가시키고 나니, 나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나는 누구인가, 이곳은 집인데, 왜 계속 일만 하는가, 계속 일하는데 돈은 왜 이것밖에 벌지 못하는가에 대한 건설적인 생각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심사위원 1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카톡 미리보기로 슬쩍 훔쳐본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려운 영화 리뷰를 너무 잘해주셔서 그런데...." 그런데..... 그리고 그다음은, 다음에 계속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