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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Jul 09. 2021

10초 안에 출근하는 이 편한 세상

재택근무, 제가 한번 해봤는데요.

재택근무의 제일 좋은 점은 다섯 걸음만 걸으면 회사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재택근무로 근무형태를 바꾸었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지만, 돈을 내려놓고 시간을 택한 나의 결정이었다. 프리랜서 계약서도 썼다. 나는 이제 월급이 아닌 주급을 받는 프. 리. 랜. 서. 가 되었다고 말해주는 계약서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방패 삼아 있는 힘껏 웃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지하철은 끝이다. 2호선, 4호선 친구들 안녕. 나는 갑니다.

10초 안에 출근하는 이 편한 세상으로.



재택근무 일주일 차, 메모장에 이런 글을 적어놨다.

<방구석에서도 돈을 벌 수 있게 기회를 주신 대표님과, 재택근무에 힘써주신 팀장님,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때의 나는 몹시 흥분된 상태였다. 출퇴근길에 힘을 쏟지 않으니, 비축된 에너지로 최선을 다해 일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해냈다. 역시 이 편한 세상이라니까! 하하!




재택근무 2개월, 내게도 소속감이 필요해.

일을 했다. 담당자들과 카톡으로 소통하고, 주마다 정산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돈은 들어오는데, 그 돈이 사이버머니처럼 느껴졌다. 더 나아가 카톡으로만 소통하는 직원들이 혹시 AI가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도 들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문제는 소속감이었다. 내 옆에는 팀장도, 동료도 없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작은 스누피 인형뿐이었다. 회사에 속하지 않으니 소속감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내게도 소속감이 필요했으니, 나는 나는 나라는 사람이 만든 회사에 다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표도 나, 사원도 나인 그런 곳. 그래서 사원증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사원증 무게에 목이 불편했지만, 쉽게 그것을 뺄 수 없었다.

당시 만든 사원증



재택근무 3개월, 워커홀릭이 되어갔다.

회사에 다닐 때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해내고 퇴근하면 됐다.(물론, 야근을 해야 했지만) 재택으로 일할 때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다 해내고도 퇴근을 하지 못했다.


나는 실시간으로 원고를 받으면 콘티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을 했는데, 만약 원고가 하루 이틀 전에 미리 나왔을 경우에는 미리 콘티를 받았다. "내일 저녁까지만 주시면 돼요. "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았다. 내일의 내가 하면 될 테지만, 거실 컴퓨터에 쌓인 일을 무시한 채, 침대에 누우면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떠올라 괴로웠다. 이건 그러니까 모기소리를 들으면, 에프킬라를 뿌려야만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것과 닮은 일이었다. 결국 새벽 12시 30분, 몸을 일으키고 일을 한 적도 있다.


심지어 주말에도 급한 건이라면 일을 받았다. 한두 시간이면 처리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원고를 받았다가, 정신 차려보니 주말에도 4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마주했다. 그제야 알았다. 아,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공간과 시간의 명확한 구분이 절실해졌다.



재택근무 5개월 차, 사내 규칙을 만들었다.

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타이머의 도움을 받았다. 화면에 타이머를 띄어 놓고, 1시간 30분이 예상되는 일을 할 때는 1시간으로 맞추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숫자들을 힐끗 보면, 딴짓을 하고 싶다가도 멈추었다. 타이머 덕분에 많은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각 채널마다 최대 시간을 정해두었다. 나는 유튜브 채널의 몸집(구독자수, 조회수)에 따라 정해진 단가에 따라 건당으로 돈을 받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A채널 3분에 2.3만 원

B채널 3분에 3.2만 원.


나는 A채널에 많은 시간을 쓰는 것보다, B채널의 콘티를 만드는 데 더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채널마다 최대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 안에 일을 하려 노력했다. 좋은 규칙이었다.



재택근무 반년 차, 사람이 그리워졌다.

점심을 먹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가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떤 분이 숨을 헐떡이며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혹시 당근이세요?"

"네?"

"당근? 당근 아니세요?"

"네? 아.. 아니에요!"

"네!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그는 쏜살같이 옆 동으로 달렸다. 나는 조그맣게 점으로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되내었다.


"와, 나 사람이랑 말했다!"


17평 작은 공간에서 모니터 너머의 세상만 바라보다가 그와 나눈 네 마디. 대화는 당근으로 시작해 당근으로 끝이 났지만, 그건 그날 내가 인류와 나눈 최초의 대화였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관계 혹은 대화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일단 일하는 시간 동안은(10-7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면? 그제야 강냉이를 털어내듯 우수수 이야기를 쏟아낸다. 남편은 지쳐서 잔다. 그리고 나도 잔다.


재택을 하기 전에는 회사에서 스몰 토크하는 것조차 버겁고, 힘들어했다. 아니, 일만 하면 되지, 왜 말을 하며 살아야 하지? 회의가 많은 회사는 망한다는 기사도 안 본건가? 생각을 자주 하던 나였는데, 이럴 수가. 이제는 내 옆자리에서 몰래 친구와 통화하던 김대리의 목소리마저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게 무슨 일이야.



재택 8개월 차, 몸이 망가졌다.

평균 걸음 수의 충격

회사를 다니지 않을수록 더 부지런해져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다니는 행위 자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이건 정말 사실이다.


평소 운동이라고는 숨쉬기가 다인 내게 출퇴근길은 운동이었고, 정해진 시간 내에 먹는 구내식당 밥은 영양소를 챙겨주는 건강식이었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계획에 맞추어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고, 동료들과의 만남은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였던 것이다.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사달이 났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때를 놓치면, 불규칙한 식사로 몸의 균형이 망가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고 쉬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일을 몰아서 하면, 디스크 초기 증상이 찾아왔다.


10초 안에 출근하는 이 편한 세상에 살면서, 내 몸과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회사에 속하지 않을수록, 정해진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에 정성스러운 밥을 차려 먹고, 최대한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하고,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중간중간 쉬어주면서 충분히 걸어주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10분이라도 밖으로 나가 햇빛을 봐주어야 하고, 고립감을 깊게 느끼지않게 노력하고, 시간 나는 대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프리랜서는 프리하지만, 프리할  없는 직업이었다. 그제야 게 됐다. 다섯 걸음만 걸으면 회사에 도착한다는 이 재택 근무의 제일 안 좋은 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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