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하게 말하자면, 쓸모없는 경험은 없음
3월, 사람인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었다. 당분간 회사를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냥 요즘 취업시장 생태계는 어떤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과거에는 항상 검색창에 <사무>,<회계> 이런 단어들만 썼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바로 <작가>. 고백하자면, 나는 늘 작가가 되고 싶었다. 별 기대없이 <작가>로 서칭된 공고를 둘러보고 있던 그 때였다.
공고내용
<주 연령층에 맞게, 시댁/막장/19금 이야기 등을...>
나는 곧장 지원 버튼을 눌렀다. 생전 처음 보는 공고에 흥분된 마음은 이내 128비트로 쪼개져 쿵쿵 대기 시작했다. 공고를 보자마자 이건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나라면 정말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왔다. 정말 비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상황. 한 시간 뒤쯤, 지원 확인 연락이 왔고, 원고 테스트로 2,000자 이내의 글을 완성했고, 나는 합격을 했다.
<근무조건>
글자당 @원,
자유근무.
6시 안으로만 원고 전송하면 됨.
콜, 하겠습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헤르미온느처럼 미친 듯이 배우는 시간으로만 가득 찼던 24시간에 쉴 틈을 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애초에 일확천금을 벌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고, 1 자당 가격이 책정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글을 쓰고, 작가가 된다는 기분은 이런 것인가. 해당글은 영상으로 만들어져 유튜브에 올라가는 콘텐츠였다. (보통 3,600자정도의 원고로 대략 18,000원 정도의 돈을 받았다.)
드디어 업무 첫날, 사랑과 전쟁과 인어아가씨로 차곡차곡 다져진 나의 막장력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 도래한 그날의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게 재생된다. 업무는 업체로부터 전달받은 원고를 순화하고, 조금 살을 붙이는 식으로 진행된다. 순식간에 타닥타닥 소리로 가득 찬 공간에서 나는 악보 없이 근사한 연주가 가능한 숙련된 피아니스트처럼,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며 3,200자의 글을 뚝딱 완성했다. 이렇게 쉬운데, 돈까지 받아도 될는지, 나는 매달 돈이 입금될 때마다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그동안 사랑과 전쟁을 괜히 본 게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를 부르짖으며 지난날의 나를 칭찬했다. 무쓸모에서 쓸모를 만들어 낸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막장드라마와 더불어 연애의 참견, 애로 부부와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보지 않았다면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을 일. 그러니까, 이 일에서 가방 중요한 덕목은 글을 잘 다듬는 재치도, 글을 구성하는 능력도 아닌, 막장을 보아도 크게 마음 쓰지 않는 강한 멘탈이었다. 머리 아픈 불륜 이야기를 매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스트레스라면, 이 일은 오래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업무는 대략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안녕하세요, 오늘 원고 몇 개 가능하실까요?"
"2개 가능합니다"
"네, 첫 번째 원고는 (예시: 결혼 3년 차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의 남모를 비밀. txt)입니다."
"넵, 알겠습니다."
" <파일 전송>, 다음 원고 보내주세요"
"와이프의 비밀", "외박 잘하는 남편"과 같은 제목의 메모장 파일이 쌓일 때마다, <아슬아슬>, <동창회>, <야릿한 관계> 같은 단어를 노트에 쓸 때마다, 돈을 벌었다. 신기했다. 웹소설을 쓰려할 때는 그렇게 막히더니, 여기에서는 "정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처럼 질주, 질주 그리고 질주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전진만 알고, 후진은 모르는 사람. 그게 나였다.
물론, 막장 글을 재구성하는 것에도 나만의 룰이 있었다. 19금 이야기에서는 적당한 수위와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19금의 선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3류의 글일 수 있지만, 글 쓸 때만큼은 1류의 마음으로 쓰고 싶었으니까. 19금 자체가 무해하지는 않겠지만, 100% 유해한 글을 쓰기는 싫었다.
오후 6시 안으로 원고를 자유롭게 보내면 되고, 관리자 분과의 합도 잘 맞아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점은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메모장에 쓸 수 있었고, 그렇게 쓴 글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하루 종일 사랑과 전쟁을 오디오로 들으면서 텍스트로도 불륜을 마주하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으나, 이상하게 그만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더 잘 하고 싶었고, 더 많이 쓰고 싶었다.
그러나 몇 달 뒤, 나는 막장의 땅에서 걸어 나왔다. 업무난이도 최하, 업무 만족도는 최상이었지만, 새로 집중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불륜과 막장 전담 기계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들어서였다. 언젠가부터 매일 챙겨보던 사랑과 전쟁을 보면, 피로감이 들었다. 안 되겠다. 그만둬야지. 좋아하는 것을 지켜야 했던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망설임 없이 지원을 했던 첫날처럼.
"그동안 피드백 잘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원고 잘 보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활짝 웃고 있는 어피치, 그는 잠옷을 입고 있는 라이언의 얼굴을 한 채로 아쉬움 없이 쿨하게 헤어졌다. 오픈채팅방을 나온 뒤에야 알았다. 우리는 얼굴도, 목소리도 모른채, 매일 같이 일을 했었구나. 그랬구나. 갑자기 그가 사람이 아니라 진짜 AI챗봇은 아니었을까?라는 황당한 상상을 했다. 3월, 개구리가 울던 즈음에 만난 우리는 8월, 매미의 맴맴 소리를 들으며 막장이 아닌 끝장을 봤다.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아 엉엉 울지 않음에 감사한 8월의 여름날, 나는 또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업무 실험기간: 2020.03~2020.08
세상에, 이런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쓸모없는 경험은 역시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