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매트가 켜지는 여름이면 생각나는 이야기
초등학교, 그곳은 나에게 차별 없는 기회의 장이었다.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운동회 계주 대표가 되었고, 팔이 길다는 이유로 농구팀에 뽑혀서 팬클럽의 사랑을 아주 잠시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학교는 공평하고 좋은 일만 가득한 곳은 아니었다. 단소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텅 빈 교실에 앉아 삑사리 나는 단소를 불어대야 하였고, 4학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1학년 교실을 청소해야 했다. 6학년이 되어서는 교장실을 청소해야 했는데 창틀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모조리 다 닦아내라는 선생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또 일기는 매일매일 쓰라고 하지, 우유는 무조건 흰 우유로 먹으라 하지, 수요일에는 파지를 가지고 오라고도했었다.
그 시절 초등학생들은 힘들었다. 지금처럼 학원을 무자비하게 다니지는 않았지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학습지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용돈이라도 받으면 토요일 주말 11시에 모여 손에 손잡고 시내를 나가 H.O.T. 오빠들의 사진, 스티커를 사 오기도 하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는 베이비복스 춤을 추고, 만나서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교환일기로 쓰고, 릴레이 소설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 놀이를 이길 수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분신사바.
이 기가 막힌 놀이를 접하게 된 건 4학년 때였는데 교복을 입기 전까지 꾸준히 했으니 초등학생들의 장수 놀이로 자리 잡은 셈이었다.
내게 마지막 분신사바는 습도 높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귀신님을 불러 대화를 하는 이 놀이의 준비물은 간단하다. 흰 종이, 볼펜, 주술사 2명, 그리고 관람객들. 종이랑 볼펜, 그리고 사람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놀이였다.
그날의 장소는 친구의 집, 거실에서 진행했다. 친구 집에 들어갈 때부터 우리는 너나 할 거 없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거실에 밥상을 펴놓고 친구와 내가 앉았다. 벽에 붙은 친구들은 숨소리를 줄이며 우리를 지켜봤다.
종이 위쪽에는 ㄱㄴㄷㄹ 자음을 적고, 아래에는 모음을 썼다. 귀신님의 이름을 알기 위함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정리하고, 손에 땀을 허벅지에 박박 문지른 후에야 우리는 서로 볼펜을 함께 잡았다. 손을 잡은 채로 눈을 감고 3초 후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디세이 그랏세이….분신사바…….. 분신사바…….오딧세이…그랏세이……….
“이곳에 오셨으면 동그라미를 그려주세요.”
우리의 손은 종이 가운데 동그라미를 쉴 새 없이 그려댔다. 아무래도 오늘은 적극적인 귀신님이 오신 게 분명했다. 오셨다고 하니 이제는 성함을 물어볼 차례, 과연 동방예의지국의 어린이들 다운 행동이었다. 순서대로 자음, 모음, 자음, 모음에 동그라미를 치고 우리는 귀신님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통성명한 후 우리는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달라고 몇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박성훈이 저를 좋아할까요?” 따위의 수준 낮은 질문에도 귀신님은 화끈하게 동그라미든, 엑스 표시든 미래의 정답을 보여줄 테니까. 몇 가지 질문을 서로 하나씩 주고받던 그때, 갑자기 주술사 친구가 소리를 지르며 잡고 있던 손을 휙 놓았다. 자연스럽게 볼펜은 흰 종이 위에 툭 하고 쓰러졌다.
처음 접한 상황에 당황한 나와 관람객 일동은 토끼 눈을 하고 주술사를 쳐다보았다. 주술사는 갑자기 자기 손이 잘 안 움직였다면서 너무 무섭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자기는 집에 가야겠다고 가방을 챙겨 문을 열고 나가는 거다. 그 어이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리는 그 친구가 느꼈을 공포감을 전달받은 것 같았다. 무서웠다.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냅다 달렸다. 우사인 볼트를 꿈꾸는 유망주인 것처럼 달리고 달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종이와 펜을 챙긴 관람객 친구 1은 우리를 쫓아오면서 말했다.
“야, 이거 종이랑 펜 버려야 돼. 같이 버려야지.”
이 의식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제대로 잠자리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즉, 저주에 걸릴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던 우리는 달리기를 멈추고 그 친구를 바라봤다. 그때 그 친구는 또 한 번 손에서 볼펜을 떨어트렸다.
“도로로 로로로”
우리는 아스팔트 위에 뒹굴고 있는 잉크가 터진 볼펜을 보며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볼펜을 주어 휴지통에 버리는 모습을 기다리는 눈치게임.
그때, 보다 못한 한 친구는 흰 종이로 손을 감싸 볼펜을 줍고 근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 걸 목격한 후에야 우리는 아파트 계단을 다시 뛰고 또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무작정 앞으로 뛰었던 그 모습이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처럼 선하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분신사바를 하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저녁밥을 먹기 전 기도를 하며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 더 이상 귀신놀이를 하지 않을게요…………”
잉크가 터진 것은 귀신을 불러놓고 제대로 보내주지 못해서였을까? 혹시 저주에 걸리지 않을까 밤새 전전긍긍했던 날을 지나 성인이 되어 결혼한 후 처음 마주한 남편 조상님의 제사상을 앞에 두고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고개를 숙였다. 조상님에게는 정말 죄송하지만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내게는 제사상의 음식이 마치 분신사바로 귀신을 불렀던 볼펜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분신사바를 하느니 나오지 않는 단소에 손을 대는 게 더 나았다. 그래도 홈매트를 켜게 되는 무더운 여름날이 되면, 밤새 이불을 꽁꽁 싸매고 두려움에 떨 것을 알면서도 토요 미스터리를 찾아봤던 그 시절, 귀신에 환장했던, 황당하고 어이없던 그 시절의 놀이가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게 참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