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에 겨울이 있으니까
내가 서울대에 못 간 건 겨울연가 때문은 아니지만, 겨울연가를 본 것처럼 공부했다면 서울대는 들어가고도 남았을 거라 확신한다. 재방송하면 보고, 컴퓨터로 다운 받아서 보고, 대본집의 지문과 비교해가면서 보고 또 본 게 벌써 몇 번째더라. 국영수를 중심으로 교과서를 이렇게 회독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생략)
겨울이 왔으니 올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매너리즘에 빠진 N년차 직장인처럼 겨울연가를 틀었다가 갑자기 한 장면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약혼남) 상혁 대신 (구남자 친구) 준상에게 가겠다는 유진이
엥! 이거 완전 바람 아니냐?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진이만 바라보는 상혁이의 지고지순한 마음을 유진이도 알면서!! 결혼 준비까지 하고 있으면서!! 첫사랑 준상이에게 다시 돌아간다고?? 할인마트에서 눈탱이를 맞아 분한 사람처럼 씩씩댔더니 남편이 "엥! 몰랐어?"라고 감정을 뚝 끊는다. 겨울만 되면, 주야장천 보면서 행복해했던 나의 인생 드라마가 결국에는 배신과 바람으로 얼룩진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니.. (게다가 상혁이와 준상이는 이복형제)
나는 서둘러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연가를 왜 좋아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눈을 감자, 눈이 보였다. 유진과 준상이는 눈사람을 만들다 첫 뽀뽀를 했고, 유진이가 홀린 듯 준상의 뒤를 따라갔던 그날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날도 눈이 펑펑 왔다.
누구나 가슴속에 겨울이 있으니까
허구한 날 내리는 눈, 목도리, 두꺼운 외투로 무장한 귀여운 사람들, 스웨터를 입고 침대 위에서 양파링을 까먹는 유진이만 봐도 거하게 행복했으니, 그 안에 그려진 미련과 배신은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던 것. 애틋하게 반짝이는 그 시절의 겨울을 어찌 모른 체할 수 있을까. 머리를 다시 고쳐 묶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또다시 신입사원이 된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겨울연가를 오래도록 보며, 올해의 겨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