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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Sep 23. 2022

포트폴리오를 갖게 된 반백수의 심정

세상을 살다 보면 유독 헷갈리는 단어가 한두 개 있기 마련이다. 포트폴리오와 포토폴리오, 캐리어와 커리어가 그렇다. 뭐? 서른 중반인데도 저걸 헷갈린다고? 심지어 포토폴리오는 없는 단어 아닌가? 근데 그걸 헷갈린다고?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 여기서 핑계를 대보자면, 포트폴리오와 커리어는 여태껏 큰 신경을 쓰고 살지 않은 것들이기도 해서 그렇다. 포트폴리오? 뭘 했어야 만들지, 그리고 만들어서 누구한테 보여준다고?라는 생각에 흐린 눈을 하고 살아온 세월이여. 5년의 회계 경력을 스스로 붕괴시킨 뒤에 계약직을 전전하다 어느새 사회생활 경력이 단절되어 버린 나의 인생이여. 그렇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은 아니다. 직접 퇴사를 했고, 내가 입사를 했다가 또 퇴사를 했고, 더 이상 입사 지원을 하지 않는 것도 나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누군가 내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유튜브를 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인스타툰을 그리면서 낮에는 파스타 포장 알바를 하는 크리에이터? 창작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프리랜서? 아무래도 크리에이터라는 말이 입에 찰싹 달라붙지 않았다. 내가 정말 크리에이터가 맞는 것인가. 인스타에 들어가 보면 죄다 크리에이터, 셀럽이라고 하던데 그건 스스로 그렇게 부르면 땡인 것인가, 크리에이터협회에 구두 허락이라도 받아야 되는 것일까. 역시 혼자 누워 생각만 하다 보면 딴 길로 세기 마련이었다.


그때 우연히 보게 된 하나의 피드. 무업 청년들을 대상으로 나만의 일을 정의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는 워크숍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청년문화공간, 용산 청년 지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나는 바로 이거다! 싶었다. 워크숍을 진행하시는 포폴 탈출의 모임장, 홍슬기 님은 진작부터 팔로우하여 그간의 행적들을 몰래 지켜보며 흠모하고 있던 나였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워크숍에 갔다.


워크숍은 총 4주간 진행되었는데, 첫 시간에는 하얀 종이 위에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마인드맵으로 나열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흠, 별 거 없는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나의 손가락은 열심히 종이 위에 지나온 시간을 적어댔다. 가장 중심이 되는 동그라미에는 나를 정의하는 표현을 쓰라고 하셨지만, 나의 상태를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던 나는 <잡.. 회사 밖..> 정도로 대신했다. 그런데 얼마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언제 이 큰 종이를 다 채우려나, 싶던 흰 종이 위에 멈출 수 없는 경험을 쏟아냈다.


쓰다 보니 깨달은 점 하나,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거나 누군가를 웃겼을 때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돈보다 재미있거나 보람이 되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럼 지금껏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으로는, 자율성이 있는 모든 일이 그러했으며, 결과물이 바로바로 나오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워크숍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솔직한 감정과 욕망을 마주했다.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스크롤을 내리며 생각했다. 그동안 왜 나는 내 콘텐츠를 숨기려 했을까?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거지?내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내가 만든 콘텐츠를 스스로가 구리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4주간의 뜨거운 피드백과 깊은 탐구 시간을 가진 뒤에, 나는 아래와 같은 한 문장을 만들었다. 아래부터 갑자기 포트폴리오 자랑 타임!



위트 있는 니트 생활을 진행 중인 창작자

니트족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점 하나.  회사 밖에는 재미있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 저를 포함한 많은 니트족들이 회사는 잃어도, 위트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회사 밖에서 꾸준히 콘텐츠를 만듭니다.


초등학생 시절; 교실 뒤편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아이엠 그라운드 게임을 할 때마다 언제나 내 닉네임은 똥퍼! 였다. 똥을 푸는 제스처와 함께, <똥퍼>라는 2음절로 끝나버리는 발음이 편한 별명이라 좋았다. 아니 근데 왜 갑자기 똥퍼같은 소리를 하냐고 물으신다면, 지금 나의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의 커리어가 가득 담김 포트폴리오를 드러낸 것이 몹시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특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무서워하는 편이다. 특히/특출 난/특별한 등과 같은 말을 누군가에게 듣는 순간 마음속에 닭살이 돋는다. 칭찬들 들으면 뒷걸음질 치는 바보 같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왜지? 왜 이 구린 글이 특히 좋다고 하지? 왜 이 별 얘기 없는 그림을 보고 특별한 이야기라고 하는 거지?라는 식으로 후려쳤던 과거의 일도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식 같은 내 콘텐츠를 후려치고, 칭찬을 받아도 부끄러워 만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포트폴리오를 공개하는 바이다. 혹시나 포트폴리오를 보고 재미있는 제안을 해주신다면 압도적 감사를 드릴 예정이오니 많은 연락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고 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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