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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니 Aug 18. 2022

완성했구나, 마침내. 34년 만에 완성한 시나리오

8주 만에 쓰인 글이 아닌, 내 인생을 담은 글이니까

시나리오 선생님과 나는 동갑이었다. 마지막 수업 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이 꼭 영화 같다는, 낭만적이지 않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와 경기도의 작은 미디어센터 내 시나리오 기초반 강의실에서 만난 것이었다.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작가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평생 공부를 해야 하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을 해야 하지? 방황하던 중, '너 글 쓰는 거 좋아하니까, 그런 과를 가 봐."라고 형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머리가 띵!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오랜 시간 투쟁한 뒤에 마침내 극작과에 들어가셨다는 아주 극적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의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날은 마침, 마지막 수업이었고, 한 명씩 차례대로 수강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사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난 제 과거가 생각나서요..' 마치 과거 있는 사람처럼 말문을 열자, 앞에 앉아계신 분조차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셨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과연 은근한 관종이 아닐 수 없다. 무튼 나는 10년도 더 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중학교 2학년, 막연히 방송작가가 되리라 생각했던 날부터 시작해서 당연히 대학도 문예창작학과를 가려했으나, 글을 쓰면 돈을 못 번다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엄마 몰래 수시를 넣었다가 모조리 떨어진 뒤, 정시로 붙은 곳이라고는 수도권 대학의 경영학부였으며, 이름 순으로 어쩌다 회계학과에 입학하게 된 나는 자퇴를 결심했다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인생에 순응하며 살았다는 이야기. 에 이어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할 게 없어 방황하다가 <편집디자인>을 배워볼까 고용복지센터를 찾아갔다가, 여자는 회계를 배워야 취업이 잘 된다는 상담사의 말에 대뜸 회계를 배운 뒤 자격증을 취득하고, 회계 일을 4년 동안이나 하고 그만둔 이야기. 하지만 요즘 세상은 어딘가에 등단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속하지 않아도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세상이라 다시 글에 대한 욕망이 생기던 도중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내가 만들어놓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쓰며 글에 대한 재미를 다시 느끼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 이렇게까지 세심한 피드백을 주시고, 칭찬도 아낌없이 주시는 선생님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는 진심 100000%의 말까지 전하고 나서야 염소 같이 떨리던 목소리가 조금 진정된 듯했다.



10년이 조금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세상만 변한 줄 알았는데 나도 많이 변했다는 말이다. 20대의 나를 떠올리면, 무채색이 떠오른다. 친구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술집에서 날밤을 새어도, 가슴 한 구석의 공허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때로는 빨리 늙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 늙어서 이 지긋지긋한 캠퍼스를, 지루하리만큼 재미없는 인생을 끝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으니까. 적성에도 맞지 않는 회계 일을 하는 그 시절도 그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1호선에 불이 갑자기 꺼졌을 때 나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어.



회사가 터지든지, 내가 터지든지

최근 재미있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도 회사 생활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배운 거..? 배운 거 없는데요!? 해맑게 말하니 그는 질문을 바꾸었다. 회사 생활을 통해 그래도 남은 건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남은 거라.. 회사를 폭파시키고 싶은 마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힘..?, 그리고 여전히 깔깔 웃으며 만날 수 있는 동기들. 그리고 또...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질문의 답을 또 하나 찾아냈다. 그 지난한 시간을 지내오며 나는 다양한 글감을 쌓은 것이었다. 이번 강의시간에 나는 <폭파 왕 김대리>라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 글에는 회사를 너무 사랑했던 김대리가, 회사에 질려서, 회사가 싫어서 회사를 폭파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직접적인 폭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터져버릴 것 같았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극 중 김대리의 입장에 몰입하다 보니 한 시간 만에 10장의 시나리오를 썼다. 물론 그 후로 꾸준히 선생님의 피드백에 따라 고치고 또 고쳐야 했지만, 앉은자리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대사를 쓰고, 인물을 움직이게 만든 일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선생님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다시 또 한 번,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선택을 한 10년 전의 선생님이 부러워졌다. 나도 극작과를 가 볼걸, 엄마의 반대를 조금 더 무시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볼 걸, 그럼 30대 중반이 된 지금 나는 글을 쓰고 돈을 버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같은 문제에 다른 답을 고른 선생님과 내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20대로 돌아가도 지금까지 했던 대로 재미없는 답을 골랐을 테니 후회할 필요도 없다는 답을 내렸다.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푸념하면서, 어이구 내 인생 재미없다~재미없어~염불을 외우면서, 돈을 벌어도 버는 게 아닌 그 시간을 견뎌 대면서 살았겠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 시간을 견뎌 낸 덕분에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니까. 시나리오를 쓰며 확실히 알았다. 내 인생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딸의 진로를 반대하는 엄마도, 내게 상처를 주고 떠난 이들도 아닌, 나였음을.


8주간의 시나리오 수업을 통해 나는 총 두 개의 시나리오 원고를 획득했다.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겠고, 시나리오는 앙증맞게 허접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를 내 인생사 엄청난 업적으로 생각하련다. 이 원고는 8주 만에 쓰인 글이 아닌, 내 인생을 담은 글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지루하고, 지난하고, 지겨운 시간을 보낸 뒤에야 마침내 완성된 나의 첫 번째 시나리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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