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자그마치 46년의 세월이 흘렀다. 너무 오랜 세월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아직까지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단정 지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책을 쓰면서 나를 찾아가다보면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정의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서로 다른 존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처음 잠재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네빌고다드의 <상상의 힘>을 통해서였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책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더라도 내용조차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단 한 문장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읽었다. 어느 순간 읽다보면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흰 색은 종이, 검은 색은 글씨라는 푸념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때 책은 절반 정도 넘어간 상태였다.
책을 읽는 것이 어렵거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덮어도 그만이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혼내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책을 덮지 못한 이유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책을 꼭 읽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계속 보려고 했던 것이다. 책을 절반 정도 넘겼을 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책 내용이 하나씩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흰 색, 검은 색 구분하던 눈은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또다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이번엔 책 내용으로 인한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책을 통해 접하게 된 것이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3년 전 알게 된 이 사실에 대해서 깊이 있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면이 받아들일 준비를 못했기 때문이다.
책을 이해조차 못하던 내가 어떻게든 책을 읽으려고 했던 이유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나는 20년을 컴퓨터 학원에서 일했다. 강산을 두 번 바꾸고도 남는 세월을 컴퓨터 학원, 한 업종에서 일했다. 그 정도의 경력이면 컴퓨터 관련해서는 전문가라 칭해도 손색없고, 실제로도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경력이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학원에서 상담 업무로 일을 시작해서 원장이 될 때까지 학원 운영을 위해 일했다. 컴퓨터로 가능한 일은 엑셀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상담하는 일은 천직이라 생각했다. 원장이 된 순간에도 나름의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평균 근속 년수가 5년 이상은 되었다. 원장이 있어서 같이 일하고 있다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힘이 절로 난다. 그래서 원장이 되어서도 상담을 계속했고, 학원 경영에 있어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나는 20년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1년의 경험을 20번 반복한 사람에 불과했다.
내가 일하는 학원은 전국에 학원을 운영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이었다. 어느 날, 동료 원장을 통해 내가 전국 지점 원장 중 가장 높은 연봉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 그동안 내 행적을 되돌아봤을 때 내가 받고 있는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그때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연봉으로만 보면 회사에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퇴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속된 말로 뼈를 묻겠다는 생각으로 일해도 되는 연봉을 받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 전국적으로 운영하는 학원의 대표는 1명이다. 대표가 곧 창업자다. 대표를 제외하면 각 지점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원장이 대표 역할을 맡는다. 수입 및 지출에 대한 결산은 본사 주도하에 집행이 이루어진다. 원장이 하는 일은 학원의 전반적인 운영관리에 힘쓰면 된다. 수업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강사 관리에 힘쓰고, 원활한 학원 운영을 위해 직원 관리에 힘쓰면 된다. 직원들도 업무 분장에 따라 분리되어 일을 진행한다. 매출에 필요한 사항은 마케팅 전담 직원만 관리하면 된다. 이런 업무를 진행하면서 평균 연봉 8,000만원, 매출 성장에 따라 그 이상의 연봉을 받았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일 하겠는가. 당연히 퇴사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고, 큰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한 오래오래 회사를 다닐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정확히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이런 연봉을 받으면서 학원에 일한다는 것이 죄책감이 들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학원 매출은 곤두박질치는 상황이었다. 코로나가 처음 발병했을 때 나는 부산에서 일했다. 대구에서 시작해 부산까지 확산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전파가 시작될 무렵에는 사스나 메르스 정도의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코로나는 점점 급속도로 퍼지며 세계를 공포에 몰아놓는 사태로 번졌다.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질병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 수위가 높아지면서 외출을 자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학원에 상담 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혹시라도 기침 소리가 들리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학원 내부에 또는 건물에 확진자가 발생하게 되면 건물 전체 소독을 위해 문을 닫아야 했다. 학원 운영을 중단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매출 감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점점 불안감이 몰려왔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러하듯 학원의 성장과 발전은 매출로 증명해야 한다. 매출 성장이 곧 학원의 성장이다. 한동안 상승 추세를 보이던 매출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정체되는 현상을 보였다. 상승 추세가 멈춰서면서 매출 향상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대표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영업부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영업부 조직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의 도움으로 영업부 조직을 위한 세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업부 조직 10명을 세팅하는데 10일 정도 걸렸다. 조직이 갖춰지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조직이 갖춰지면서 이미 매출은 성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흐른 뒤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은 것이다.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직원을 해고해야 하는 위기에 놓였다. 아무리 유능한 영업 조직이라 하더라도 두려움으로 무장한 고객들을 모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없어질 거라는 기대와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코로나는 더욱 위력을 뽐내며 세력을 넓혀갔다.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텼다. 대표도, 학원도, 나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기회가 다시 만들어졌을 때 영업 조직을 다시 만들기로 했다. 짧지만 함께 매출 향상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영업부 직원들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다. 마음이 착잡했다. 학원을 운영하는 책임자로서, 인생 선배로서 나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직원들이 근무하는 마지막 날 그들과 함께 소주잔을 부딪치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직원들은 이해한다고 말해주었다. 자신들도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그 후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학원의 총 책임자로서 하락하는 매출 곡선을 보면 가슴이 먹먹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직원이 아닌 나였다. 오랜 경험을 인정하고 대우해주기 위해 학원에서는 고액의 연봉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월급 갉아먹는 기생충과 다름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더 이상 나로 인해 또 다른 직원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학원에 사표를 내기로 결심하고 밤 12시, 차를 몰고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나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 건 누구였을까. 진짜 나였을까, 아니면 가짜 나였을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 두 개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문득 글을 본 듯한 기억은 있지만, 그조차도 하나의 단어에 불과했다.
진정한 자아는 절대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외부적인 영향으로 반응하는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 것은 모두 가짜 나가 느끼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와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그 어떤 영향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진짜 나를 안다는 것, 이것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단지 나를 안다는 것과 진짜 나를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인생의 중반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진짜 나와 가짜 나의 존재. 앞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후반은 진짜 나가 활기 칠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