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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Nov 11. 2018

여행! 그것은 당신 영혼을 요동치게 한다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 시리즈.

2010년 추위가 절정이던 1월 혼자 뉴욕으로 떠났다.

태어나서 처음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설렘은 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새벽에 공항으로 가야 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배웅하셨다.

 '나는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보다 걱정과 불안으로 변해 내 몸에 스며들었다.

찬 공기는 그날따라 더더욱 차가웠다. 비행기에서는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한글은 사라지고 시야에 보이는 모든 부분이 영어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미국임을 알았다. JFK공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타임스퀘어에 도착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타임스퀘어를 보니 반갑기보다는 눈물이 먼저 나왔다.

하루를 마치고 종종 타임스퀘어 사진을 본다. 뉴욕에 대한 환상 보다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의기소침할때 보면 이 사진은 나 자신에게 참 많은 위로가 된다.

'나는 할 수 있을까?'라는 출발 전부터 던진 질문에 처음으로 답할 수 있었다. 격앙되는 감정.

"뭐 어떻게 되기는 한다??" 두려움이 안도감으로 안도감이 자신감으로 조금씩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타임스퀘어서 흘린 눈물은 대견함이었을지 모른다. 그 감정은 그 이후 느끼지 못했다.

처음이었으니까. 두 번은 없는 대견함이다. 그 후 두 번째로 떠난 도쿄에서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잠만 잘 잤다. 심지어 공항 바닥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뉴욕에서 느낀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은 무엇인가 마음의 방어벽이 되었으리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이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모든 이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뉴욕에 갈 때는 아니었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지은 기행 시리즈는 여행을 가기 전에 꼭 읽는다. 

영국, 스페인, 일본 중국, 러시아, 지중해 기행 중 아무 책이나  고른다.(모레야는 아직 못 읽었다.)

내가 비록 카잔차키스와 친구가 될 수 없어도, 책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다.

친구가 떠난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책을 보면 카잔차키스가 떠난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우리 모두 곧 떠날 여행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나는 왜 떠나는가?"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여행은 이미 시작된 거다.


그의 여행을 담은 기행문 시리즈 속 글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그 자신의 느끼는 모든 생각을 격앙된 감정 혹은 우수에 젖은 문장으로 담아낸다.

다른 하나는 그가 본 풍경에 대한 묘사 그 자체다.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담긴 풍경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멈추자마자

다시 주변의 시선과 사물로 돌아간다. 갑자기 어느 순간 격앙된 그가 감정을 토로한다. 

문장에서 정신이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나 '영혼의 자서전'을 보다가 기행문 시리즈를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질문이 들 정도다. 적지 않게 당황스럽디다.

문장은 짧게 서술되었다가 한 순간 역동적으로 변한다.

어떤 부분은 냉소적으로 차분히 그려나간다. 격앙된 감정으로 논조가 다시 바뀐다.

그 와중에서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화면이 짧게 지나가다가

 롱테이크 화면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참으로 변덕스러운 사람이네....' 기행문 시리즈는 읽다 보면 

이 같은 생각을 한 두 번 하는 게 아니다. 글로 만나는 카잔차키스는 참 변덕쟁이다.

(아하! 카잔차키스는 이미 고인이다.....)


영국 기행문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셰필드: 여기도 마찬가지다. 매연에 얼국진 얼굴들, 석탄으로 더러워진 연약한 종아리들, 

끝없이 이어지는 모양의 공장들, 벽돌로 지은 역겨운 공동주택들, 

고통 가득한 표정들. 노동자 들은 시무룩하고 냉정해 보인다."


이 같은 셰필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러다가 바로 다름과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그들의 두 눈은 푸른 강철 같다. 나는 그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되리라.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뿐. 

나는 고개를 돌리면서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비극적 상황이 터져 나온다. 도시는 현대의 어느 천재 작가가 

써놓은 비인간적인 드라마다.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징도들, 

절규와 침묵과 빈정거림, 극에 달해 버린 오만, 이런 것들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카타르시스의 제5막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한다.


셰필드 사람에 대한 묘사가 끝나 읽는 우리가 집중하기도 전에  

셰필드를 보는 자신의 마음을 격앙된 어조로 빠르게 적어간다. 

이 같은 구조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기행문의 특징이다.

아님 그의 변덕이거나.... 만약 변덕이라 해도 묘하게 자꾸 빠져든다.


다음은 지중해 기행의 일부다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위엄을 지키며 그 심연 앞에 서는 것.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울부짖지 지도 껄껄냐지도 말아야 합니다. 

눈을 가려서도 안됩니다. 침착하고 조용하게 희망과 두려움을 모두 버리고 

그 깊은 균열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행문을 읽는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인지, 기행문을 읽는지 종종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단순하게 여행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여행지를 다니면서 자신이 품은 생각의 찰나를 그는 계속 적어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가 가진 순수한 영혼의 독백과 색감을 볼 수 있다.

특정한 색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는 여러 색이 중첩되어서 번져간다.

우리에게 담긴 영혼의 역동성. 우리도 종종 여행 중 느끼는  자신만의 통찰을 

그의 여행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책은 쉽고 가뿐하게 읽히다가도 종종 순간적으로 흐름이 막힌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행문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여행은 떠난다면 당신의 영혼을 무엇을 볼 것이요?"라는 질문은

책을 놓고 나서도 가슴속에 계속 맴돈다.

영상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여행에 대한 기록은 글보다는 

사진과 영상이 더 설득력을 얻는 시대다.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사이트에는 여행 영상이 오늘도 수없이 많이 올라온다.

지인들과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설명을 위해 

스마트폰 영상을 보여주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여행을 위해 글을 쓰는 일은 어쩌면 현시대 소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진부한 과거일지 모른다.


우리는 여행을 무엇으로 기록해야 할까? 기행문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이에 대한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여행을 통해 자아를 마주하는 법은 가르쳐줄지 모른다.


"정오에 우리는 기차에 올랐고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1천 년이 지난 지름, 우리는 다시 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 

빛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빛을 받기 위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 러시아 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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