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나를 보기 위해 오늘을 복기한다.
화양연화의 사전적 의미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가게에서 일하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가게에서 일한 6년은 가장 힘들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성장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겪은 감정을 글로 남기기 위해서 이 글의 제목을 '화양연화'로 지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씨앗을 피우고 비바람을 이겨내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꽃은 필 수 없다.
내가 운영했던 브런치카페&스테이크하우스의 하루 일과를 다음과 같다.
아침 7시에 일어난다. 밥은 그냥 어떻게든지 먹는다. 7시쯤에 가게에 나가서 8시까지 청소를 끝낸다.
청소를 끝내면 그날 가게에서 사용할 식재료들을 확인한다. 반드시 최근 물가동향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동네에 마트 3곳에서의 식재료 단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메뉴 원가와 식재료 원가를 비교하면서 식재료를 구매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로컬'을 강조한다. 실제로 장사를 하면 로컬. 즉, 지역 상인분들과 친해져야 물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수월한 장사가 가능하다. 정보교환은 기본이다. 그렇다고 대형마트가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대형마트는 물가를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가격을 체크한 후에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 간다.
나는 눈이 나빠 자서 자동차 면허도 없다. 6년 가까이(이제는 가지 않지만) 매일 온 마트.
야채 가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억하면서 야채 코너에 간다. 아주머니들과 인사를 한다.
안부를 묻고 잠시나마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하신 아주머니들은
각자마다 사연들이 있다. 그렇게 재료를 사 오고 재료를 손질한다.
미리 준비한 식재료가 많다면 좋다. 준비할게 적으니까.
브런치카페니까 커피를 정말 많이 마신다. 에스프레소 두 잔을 내려서 롱 블랙으로 마신다.
그렇게 정신을 다시 차리고 재료를 손질한다. 재료 손질이 끝나면 마무리 청소를 한다.
이게 수월하게 끝나면 좋다. 하지만 그런 적은 별로 없다.
가끔은 20분 정도 멍하니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즐긴다. 사실 이런 날은 1년에 몇 번없다.
스스로 만든 마카롱, 초콜릿을 먹으며 맛을 확인한다. 레시피를 체크하고 질감 및 변화를 노트에 적는다.
그렇게 10시 정도 되면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난다. 오히려 손님들이 일찍 올 때도 있다.
영업시간이 다가오면 손님들이 한두 명씩 온다. 손님을 맞고 주문을 받고 음식을 만들면 금세 11시다. 오전 11시(배달 라이더스는 11시에 시작한다)가 되면 배달도 시작이다. 12시 점심시간이 된다. 요식업을 하는 이들에게 점심은 그날 매출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점심시간은 언제나 엄청 집중해야 한다. 배달 알림음이 울리고, 라이더와 만나고, 클레임을 해결하고, 리뷰를 달고(리뷰는 대표인 형이 전담.), 가게 손님을 받는다. 점심을 못 먹기 때문에 수시로 먹을 음식을 미리 해놓기도 한다. 오트밀 죽을 만들어서 수시로 먹기도 한다. 정말로 힘이 들 때는 그냥 설탕을 먹는다. 혹은 시럽을 그냥 마시기도 한다.
이렇게 2시 30분이 지나면 손님이 빠지기 시작한다. 다시 재료를 확인하고 부족하면 장을 보러 간다.
그렇게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을 마치면 대략 9시 30분. 마감을 하면 오후 10시 정도가 된다. 집에 가서 1시간 정도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고 1시간은 운동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다. 그리고 이게 무한 반복.
사람 만날 시간이 없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없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 인간관계 그 자체에 무뎌진다.
카카오톡에 온 메시지를 1주일이 지나서 본 적도 있다. 종종 친구와 전화를 한다. 친구가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묻지만 '된다' 보다는 '안된다'는 말을 더 많이 한다.
"넌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데?" 그저 '미안하다'라고만 한다.
도쿄에서 사 온 선물을 친구에게 전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보니 유통기한이 지나서 내가 먹은 적도 있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하나씩 사라져 간다. 연락을 하지 않으니 소식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종종 가게에 시간이 나서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일에 치이도 치여서 환대를 못해준 이들도 있다.
마카롱을 사준 형들에게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사실은 다 기억하고 있다. 다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서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종종 말도 없이 찾아와 준 사람들. 다 기억하고 있다. 일에 너무 치여서 기억하려고 노력하다가 까먹는다.
모든 일에는 지금 항상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건 반드시 해야 한다. 미루면 안 된다. 책임감은 멋진 게 아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는 것'. '결과를 남 탓으로 돌리지 않는 태도'. 이게 책임감이다.
"나는 이걸 하고 싶어!"란 구호는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끝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그걸 모르고 당장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어 한다. 나 역시도 내가 하고 싶은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부터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했다. 나의 친형은 이 과정을 넘어가고 싶어 하는 나를 무척이나 채찍질했다. 그 덕분에 나는 밑바닥부터 하나씩 해결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세상에 지름길은 없다. 지름길이 있다면 정도를 지키고 자신을 알아가는 거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4,5년 전 나는 오만했고 주제를 몰랐다.
'누군가 멋져 보이는 일'은 그 일이 되게 만드는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다.
회사는 그게 된다. 하지만 자영업은 그런 거 없다. 혼자 다해야 한다.
지금까지 적은 브런치 글에서 '나는 기획이 아닌 구현에 적합한 사람이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이 말은 매일 반복되는 루틴 속에 사 발견한 내 모습이다. 나는 기획력이 약하다. 그래서 매일 좌절한다. 가게를 그만둔 지금 매일 아침마다 좌절하고 그 좌절감을 마주하며 괴로움을 이겨나간다.
인간관계는 이 같은 괴로움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희생하는 산물 중 하나다. 회사생활을 하지 않아서 난 직장인들 마음을 모른다. 브런치에 쓰인 퇴사에 관한 글들. 경험하지 못했기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읽지 못한다. 몇 달 전 강남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몇 천만 원을 광고로 태운다'는 말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나는 단 500원 은행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서 ATM에 갔고, 토스와 페이코 송금도 아껴가면서 사용했다.
식재료 할인시간에 물건을 더 잘 고르려고 상품을 고르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난 직장인들의 마음을 모른다. 그렇지만 자영업자들의 마음을 안다.
언젠가 매거진 B에서 조수용 대표가 '장사'를 영어로 하면 '비즈니스'다 라고 적은 문구를 보았다.
그 몇 줄 글에 이상하게 힘이 났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는 '규모가 있는 무언가'로 생각한다.
장사는 '작고 소박한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실제로 장사를 한다고 하니 눈빛이 바뀌며 무시하는 사람을 한 두 번 만난 게 아니다.
나는 장사에 규모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굴러가는 건 규모에 상관없이 묵묵히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나는 이상하게 그런 걸 스스로 찾아서 한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스스로 힘들어한다. 내가 봐도 나는 좀 이상하다.
사실 내가 브런치에 지독하리만큼 사진을 넣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내 경험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솔직히 사진을 더 넣고 싶지만 사진을 빼느라 고민한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 시작할 때 '자료'가 너무 없어서 고생했다. 밤을 새우며 자료를 찾고 졸면서 음악을 듣고, 유튜브를 보면서 재료비율을 계산했다. 오늘도 누군가 '나 같은 무식한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2019년 9월 교토는 정말 더웠다. 39도로 찍어내는 뜨거운 태양에 선크림을 발랐음에도 너무나 아팠다.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혼자서 "성은아! go!"하고 외친 건 단 한 명의 구독자 때문이었다. 언젠가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10가지 에세이'에 구독자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집에 오니 좋아하던 글이 올려져 있네요. 행복합니다. 계속해서 글을 써주세요"
한동안 모니터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나는 수시로 내 브런치 첫 글을 본다. 초심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20 19년 9월에 도쿄, 교토를 간 건
단 '1명'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서다. 일본에 가기 전 여러 개의 브런치 글에 올린 구글 설문지에는
오로지 단 1명만이 설문에 응했다. 참 고마웠다. 도쿄와 교토 쪽 숙소를 다 잡고 떠날 채비와 윤곽을 그려놓고 보니 일본의 반도체 소재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터져버렸다. 정말로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그냥 갔다. 솔직하게 구독자 1,000명이 넘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생겼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항상 한결같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 이 같은 두려움에 잠을 자지 못했다. 두렵고 또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