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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을전하는남자 Oct 03. 2020

궁궐에는 한국인의 미의식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권력이 밑바탕인 공간은  권력이 지향하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이번 글은 창덕궁 후원 미학, 디자인에 대해 다룹니다.
역시나 분량 조절 실패로 글을 3개로 나누었습니다. ]


조선궁궐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디자인이 반영된 장소다.

궁궐은 그 시대 최고 기술, 자재, 격식을 담아지었기 때문이다.

궁궐건축은 조선왕조의 역량을 결집한 곳이다.

예술을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가 추구하는 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창덕궁을 지은 건 태조 이성계가 아닌 태종이다.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오른 태종은 경복궁에서 조선을 통치하지 않았다.

개성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을 짓고 한양으로 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형제을의 피를 묻힌 손으로 왕으로 올랐기에,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만든 경복궁을 사용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껄끄럽거나.

또한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와 달리 조선의 수도를 한양이 아닌 무악을 삼고자 했고,

정적이었던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창덕궁의 인정전은. 근엄한 근정전과 결이 다르다.

태종이 죽고 난 뒤, 세종은 창덕궁에서 다시 경복궁으로 옮긴다.

세종은 경복궁을 국가의례를 수행하는 적합한 곳.

태종 즉위 기간 동안 비어있었던 경복궁을 정궁으로 정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반면에 창덕궁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과 함께 제2궁으로 양궐 체재를 이루었다.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조선 후기에는 법궁 및 정궁 역할을 겸했으며

경희궁과 경희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 사이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했다.

이 때문에 창덕궁은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 못지않게 쓰임새가 잦았던 궁궐이었다.

반대로 조선 후기에는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용하느라 창덕궁을 떠나 있었을 때도 많았다.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200년간 유지하던 정궁 지위를 상실했지만,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황궁이 되었고 대한제국과 운명을 함께했던 궁궐이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까지 모두 '일직선이다.

경복궁은 조선왕실이 추구하는 국정의지가 담긴 힘이 담긴 건축이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후원까지는 건물 동선은 모두 일자다.

일자로 설계한 경복궁 구조와 동선은 그 자체만으로 조선을 상징한다.

정문, 정전, 편전, 침전을 모두 일직선으로 질서 정연하게 배치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이 같은 직선 구조는 ‘왕이 조정을 바라본다’는 유교통치 질서를 공간감으로 구현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광화문 앞에서 세종로를 바라보면 멀리 남산까지 그 풍경이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탓에 경복궁은 다소 경직된 면이 적지 않다.

정부종합청사, 주미대사관,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과거 육조, 의정부, 3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광화문 앞에는 '이호예병형공'등

선 최고급 관청인 육조가 좌우에 있었다.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그 자리에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경복궁과 그 근처는

왕과 백성 모두 어느 곳에 편하게 마음을 둘 곳이 없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보조역할을 했기에, 근엄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에 창덕궁은 시작부터 경복궁과 달랐다.

경복궁을 따라 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창덕궁은 그 목적 자체가 이궁이기에,

‘강한 통치’보다는 ‘통치를 보조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창덕궁을 지은 태종은 경복궁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그곳을 설계한 인물이 정적이었던 정도전이었으니까.

산속에 궁궐을 잘 집어넣은 느낌이 강한 창덕궁.

산이 감싸고 숲이 우거진 창덕궁.

이 곳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조선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욱 좋아하고 머문 적이 많았다.

17세기 이후 불탄 경복궁이 다시 재건되기 전까지,

창덕궁은 경복궁이 하던 역할을 대신했다.

창덕궁이 경복궁을 대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왕실 기능을 보조하던 이궁이라는 목적과

국가를 통치하는 조선왕의 정서를 매만져주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정서적으로 부드러운 창경궁과 종묘와 연결된 지리적인 특징도

창덕궁이 경복궁을 오랜 시간 대체할 수 있었던 이유일지 모른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다르게 아기자기하면서도

적절하게 긴장감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경복궁과는 전혀 다르다. 창덕궁은 응봉에서 완만하게 내려오는 경사지다.

경사지 사이에 작은 골이 형성되어있다.

그 골 사이로 맑은 샘물이 흘러내린다.

경복궁만큼 넓고 평탄한 대지가 많지 않다.

그 대신 지형이 다양하고 변화가 많다.

창덕궁의 특징은 이런 지형조건을 살리면서도 궁궐 기능을 수용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근정전과 다르게,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나무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

불규칙한 지형을 살려낸 창덕궁.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건물들은 경복궁과 다르게 율동감 넘기는 공간을 만든다.

차분하면서도 긴장감이 조화를 이루며 리듬감을 만든다.

지루할 틈이 없다. 후원도 마찬가지다.

후원은 기하학적이고 인공적인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연 그 자체다.

골짜기가 이어지고 골 사이로 흐르는 샘물들.

그 흐름에 맞춘 크고 작은 누각과 정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처럼 창덕궁과 후원은 운봉에서 내려오는 자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깎아내지도 자르지도 않는다.

창덕궁은 직선과 곡선이 공간에 힘을 불어넣고 있다.

그보다는 자연이 가진 자연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직선이 아닌 ‘직선과 곡선’을 풍성하게 사용한 창덕궁이

경복궁과 다른 이유는 자연을 존중하고 그 흐름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는 궁궐 동선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복궁은 [광화문-흥례문-근정문]까지 직선 구조가 근엄함을 연출한다.

반면에 창덕궁은 [돈화문-진선문-인정문]

직선과 곡선이 긴장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신정전을 지나 낙선재로 향하는 길목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건물을 지은 창덕궁의 존재는

한국인이 어떤 식으로 자연을 접근하는지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공간이다.

‘목적’에 합당한 조화로운 접근.

이러한 접근이 한국이 추구하는 디자인,

기획이 어떤 면에서 다른 지도 유추해 볼 수 있는 힌트를 주기도 한다.

경복궁과 다르게 종묘, 창덕궁, 창경궁은

한국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내가 이 공간들을 꼽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 권력이 기반이 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밑바탕이 된 공간은

권력이 지향하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도 권력중심이 되는 도시는

언제나 화려하면서도 위엄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 안에는 권력이 허용하는 ’ 디자인’들이 도시에 스며든다.

그렇기에, 궁궐이 그 나라가 추구하는

최고 디자인과 위엄을 보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과 의회. 마치 로마시대 집정관과 원로원을 연상시키는 건물구조,

워싱턴 DC. 워싱턴 DC 내 건물들은 로마 건물을 많이 닮았다.

링컨기념관에서 바라보는 국회의사당.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대리석 건물들.

그 건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미지화시킨다..

51개 주가 하나로 합쳐진 국가.

여기에 워싱턴 DC만의 근엄하면서도

무겁고 차가운 공기는 이를 더더욱 배가시킨다.

자유와 변화가 숨 쉬는 뉴욕과는 전혀 다르다.

만일 워싱턴 DC가 가진 차가운 정서를 알고 싶다면

넷플리스에서 만든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면 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드라마는 워싱턴 DC가 어떤 도시인지 제대로 보여주니까

내가 느낀 워싱턴 DC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한 드라마는 하우스 오브 카드다. 출처: 넷플릭스

지도자가 있는 곳은 기업과 국가  모두 그들이 지향하는 디자인과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언제나 권력이 만드는 아름다움은 불편해도 그곳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이 된다.

일본 일왕이 거주하는 도쿄  마루노우치 고쿄나 교토에 자리한 별장인 가쓰라 리큐.

교토 후시미 이나리 신사, 메이지신궁만 해도 그 규모는 크고  규칙적이다.

또한 그곳에 지어진 건물들은 인공적인 직선이 강하다.

일본 전체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일본 왕실의 팽팽함.

일본 왕실과 관련한 공간에서는 언제나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종묘는 다르다. 종묘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조선왕실을 이끄는 왕에게 종묘제례는

조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일이자,

더불어 왕 스스로도 언젠가 마주할  죽음을 익히는 곳이었다.

왕은 종묘 신로를 걷고 제사를 지내고 예를 배운다.

세자도 그런 왕을 보면서 배운다.

이를 통해 ‘왕’에서 ‘왕’으로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이어진다.

 

종묘는 서양으로 치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는 장소다.

하나 죽음을 어둡고 무겁게만 대하지 않는다.

그윽하고 차분한 자연 속에서 마주하는 죽음은 엄숙하면서도

자연과 교감하는 곳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

죽음은 ‘종료’를 지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문이다.


종묘가 창덕궁 후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연의 흐름을 깨지는 않는 이유는

죽음을 대하는 이러한 자세 때문이다.

두 장소 모두 ‘조화’와 ‘어울림’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자연이 있다.

두 곳은 서로 공간 성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동질성을 느끼는 이유는 이 같은 자연을 다루는

우리 조상들의 가치관 때문이다.

이러한 미의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져오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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