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모든 부분에 반영된다. 브랜딩은 그것을 말하는 단어 중 하나
19세기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예술은 개인 감각을 ‘전하는’데 집중했다. 인류 역사를 생각해보면, 개인 감각이 '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시기는 요 근래 100년 정도다. 그렇기에‘감각을 구현하는 일’은 사실주의에서부터 현대미술을 읽어내는 핵심 키워드다.
피카소는 말했다. “모든 어린이들은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도 예술가로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예술가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예술가는 사업가와 같은 모습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농부, 사진가, 요리사, 디자이너들을 포함해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도 예술가적인 면모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에서 예술가가 된다는 말은 나만의 ‘개성’을 구축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걸 지금 ‘브랜딩’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본인 스스로가 브랜드다. 그렇기에 브랜딩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특히 예술가는 ‘실용적’인 기능이 전혀 없는 물건을 팔아야 한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에게 브랜딩은 필수적인 것이다. 기업과 예술가들이 협업할 때 프리미엄이 붙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비주얼 아티스트인 톰 삭스는 오랜 시간 동안 수작업 프로젝트인 '마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선보이면서 '우주'에 관한 독보적인 지위를 얻었다. 마스 프로젝트 이후, 나이키와 톰 삭스가 협업으로 선보인 '마스 야드 신발'은 놀라운 흥행과 경이로운 리셀가를 기록했다. [마스 야드는 현재 스탁스에서 1켤레당 평균 9백만 원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앤디 워홀은 자본주의의 기반인 돈과 물질. 이 두 가지를 창작 주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앤디 워홀은 쿠르베, 마네, 폴 세잔이 보여준 '감각을 구현하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코카콜라와 캠벨 수프 같은 상품들, 유명인의 초상. 달러 기호를 실크스크린 인쇄로 찍어내 판매했다. 그가 선보인 팝아트는 그 자체로 이쁘다. 하지만 팝아트는 이쁘고 감각적인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가 만든 ‘획일화’를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사실 진정한 자본주의 미학은 코스트코 같은 창고형 매장에 있음에도 말이다.
예술은 브랜딩과 나누어서 보는 개념이 아니다. 애초부터 예술은 브랜딩을 가장 잘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베니스, 피렌체,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 같은 예술 중심지가 국제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제적인 브랜딩과 디자인이 여전히 뉴욕을 비롯한 미국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창의성이 몰리는 지역에서 브랜드에 예술적인 감각이 가득한 ‘브랜딩’이 나오지 않는 일이 오히려 이상하다.
예부터 오늘날까지 사업가의 본능을 지는 예술가는 돈에 이끌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면이 현대시대에 와서 생긴 걸까? 아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루벤스는 훌륭한 예술가이자 사업가였다. 또한 그는 브랜딩에도 매우 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안트베르펜에 있는 작업실에서 조수들을 고용해 그림을 그린 사실은 유명하다. 조수들이 공방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루벤스는 화려한 유럽 귀족들의 저택과 성을 방문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체면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바로크 미술작품'을 집안에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루벤스는 이걸 너무 잘한 덕분에 ‘외교관’이 되기도 했다. 즉, 루벤스는 귀족들에게 '바로크 미학으로 당신을 돋보이게 하세요'라고 귀족들에게 브랜딩을 제안한 셈이다. 마케터들이 '브랜딩'에 신경 쓰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 '예술적인 본능'에 이끌리는 면도 적지 않다. 마케터를 그저 홍보 혹은 PR로 정보로 생각하는 일을 지극히 잘못된 접근이다.
예술은 브랜딩과 동 떨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브랜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루벤스가 유럽 귀족들에게 바로크 미술을 판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크 미술'이 가진 정치 사회적 의미와 귀족들 간의 상관관계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틈새. 그 안에 존재하는 니즈를 자신의 브랜딩 기반으로 삼았다. 보통 우리는 브랜딩을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루벤스는 그 목적에 매우 부합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트렌트 공의회가 정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이걸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했을 뿐이다.
‘시대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도 예술이다. 이러한 작업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기업들이 담당하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기업들은 과거 살롱전이 추구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제품’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제안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그렇기에 기업들은 예술을 상업적으로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이 상업디자인과 순수예술로 나눠졌을 뿐이다. 단지 그 겉모습이 실용적이라서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한 뿐이다. 뒤샹이 만든 레디메이드는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오히려 뒤샹은 그 경계를 섞어버렸다. 작고한 버질 아블로는 이를 무척이나 잘 알았고, 이걸 ‘오프 화이트’를 포함한 자신과 협업한 모든 프로젝트에 응용했다.
디자이너 자크뮈스는 어떠한가? 그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삶의 원동력으로 다시 만들었다. 그는 어머니를 뮤즈로 삼아 자신의 감각을 선보인다. 그가 라벤더 밭에서 보인 패션쇼는 이를 가장 극대화한 모습 중 하나다. 농부였던 어머니. 프랑스의 농업과 식문화를 고스린히 가지고 있는 프로방스 지역. 그러한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라벤더. 클로드 모네가 자신의 첫 아내인 '카미유 몽 시외'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자크뮈스는 농부였던 어머니를 추억하면서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기억들을 옷에 담아냈다.
세계적인 신발 디자이너인 살레히 벰 버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하이킹에서 겪은 경험을 뉴발란스, 크록스와의 협업에 모두 쏟아부었다. 뿐만 아니라, 스니커즈 신과 흑인들의 힙합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스니커 헤드였던 그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스니커즈 신을 베르사체에 고스란히 이식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꼼데 가르송과 발렌시아가가 먼저 발견했다. 꼼데 가르숑은 슈프림과 나이키와의 협업을 통해 하이앤드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의 경계에 무난히 안착했다. 뎀 나 바질리아와 마틴 로즈는 발렌시아가 남성라인에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테일러 디자인을 현시대의 아름다움에 맞게 다시 설계했다. 아쉽게도 이 작업을 이끈 마틴 로즈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뚜렷한 '감각'을 선보이지 못하던 발렌시아가 남성복 라인의 전반적인 틀을 리디자인 했다. 이 과정에서 스피드 러너와 트리플 S 같은 스니커즈가 탄생했다.
일본 디자이너인 오가타 신이치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일본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일본 예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 일본만의 ‘분위기’를 모든 기획중심에 놓는다. 이는 그가 만든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작업한 공간은 언제나 '긴장감이 가득한 고요함'이 중심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공간에서 '절제', '비움' 같은 일본 미학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렇기에 그가 만든 공간은 전혀 일본적이지 않다.
오사카의 신사이바시에 자리한 이솝 매장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에 일본 미를 가미한다. 그렇기에 이솝 매장은 일본 미가 느껴지는 모던한 공간에 가깝다. 그가 작업한 모든 공간들이 이러한 흐름을 따른다. 는 자신에게 작업을 맡긴 브랜드가 가진 '절제'와 '비움'을 찾아낸다. 그 후 '비움'과 '절제'라고 대표하는 일본 미를 유연하게 적용한다. 이는 구스타브 쿠르베가 고전주의 미술 양식을 통해 ‘고전주의 양식이 추구한 주제들’을 의도적으로 비판한 것과 맥락이 유사하다.
오가타 신이치로는 이러한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일본의 아름다움을 현시대에 표현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일본 전통미는 과거로부터 구축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저의 디자인 철학은 형태 구축이 아닙니다. 어떠한 형태의 분위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분위기를 구성하고 배치하는 일이죠. 이것이 제가 만드는 공간 철학입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니멀리즘이 추구한 가치를 건축으로 구현했다. 그가 강조한 디자인 철학인 ’Less is More’는 디터 람스를 통해 산업디자인으로 더 확장되었다. 동시에 디터 람스는 'Less is better’를 'Less is better’로 더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애플의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아이브는 이것을 지금의 애플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또한 모든 애플 제품에 사용되는 시스템인 IOS와 그 안에서 사용되는 서체들. iOS와 경쟁하는 안드로이드에서 제공하는 각종 UI도 ‘감각’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보이는 모든 행동들은 ‘감각’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