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제주도를 시작하며.
코로나가 발생한 뒤, 제주도는 해외여행의 대안이 되었다.물론 그 이전부터 제주도는 ‘한 달 살기’를 포함해 사람들이 ‘변화’를 시도하는 공간이었다.브랜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 브랜드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시대. 이제 애플을 검색하면 과일 ‘사과'가 아닌 IT기업인 애플이 먼저 나온다.
브랜드는 ‘도시’라는 충분한 인프라가 있어야 ‘구현’ 가능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실제로 트렌드를 이끄는 많은 브랜드는 트랜디한 도시에 많으니까.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도시’ 그 자체가 브랜드가 지향할 ‘미학’ 그 자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교토’에서 보았다.
2019년 교토에 간 건 여행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쿄에서 본 브랜드와 공간. 그곳에서 본 수많은 디자인, 공간 그리고 브랜딩이 무엇에 영향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내가 교토에서 발견한 것은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미학. 정원, 사찰, 분재에서 발견한 ‘편집된 자연’이었다.
일본 정원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정원은 자연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일본 정원은 전쟁으로 정신이 피폐해진 무사들. 그들의 PTSD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특히 무사들이 겪는 PTSD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줄 ‘몰입할 수 있는 자연'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일본 정원을 보며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나는 료안지에 전 세계사람들이 정원을 보면서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만큼 일본 정원이 ‘아름다움’을 잘 구현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료안지의 석정 정원에 오는 수많은 이들은 직관적으로 정원에 집중하며 명상한다. 일본 정원은 기획의도가 분명했기에, 마음을 수련할 수 있는 ‘편집된 자연’이 나올 수 있었다.
교토는 현재 일본의 4,5번째 도시다. 하지만 교토는 외국인들에게는 도쿄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떠한가? 서울은 다르다. 서울에서 발견하는 많은 기획은 일본과는 다른 세밀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세밀함’은 ‘분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밀함은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반면에 분류는 잘 '나눈' 거에서 그친다. 서울은 언제나 ‘세련된 조화’를 추구한다. 서울은 단순히 취향을 전하는 단순한 ‘목적’에만 부합하는 면에서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서울은 자신이 추구하는 개성을 보다 ‘세련’되게 전하고자 한다. 성수동에 생긴 수많은 가게들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SNS는 공간에게 ‘확실한 정체성’을 갖도록 요구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에 찾아가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공간은 사람들을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 오히려 인스타그램의 등장은 공간이 추구하는 ‘개성’을 보다 세밀하게 만들게 강요했다. 정확하게는 공간 자체가 페르소나를 가지도록 요구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갑자기 나온 게 결코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정보, 유통, 광학, 물류기술을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술은 천천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감각. 그 감각을 구현하는 기반을 바꾸었다. 특히 건축과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더 주목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버질 아블로, 매튜 윌리엄스, 트리미언 에머리, 태디 사티스등 미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더 새로운 감각을 선보인다. 한국만 해도 아티스트 박재범이 론칭한 '원소주'가 오픈런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지금은 비로소 감각이 모든 기획과 구현의 중심에 있다. 동시에 그 감각은 철저히 개인의 편집력에 기반한다. ‘감각’은 기술보다 더 우선시 되고, 기술이 감각을 보다 쉽게 구현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어떠한 공간이든지, 공간은 주변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그 조화는 모든 부분에서 지역을 해치지 않는 방향을 ‘지향’한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서울은 언제나 주변과 조화를 생각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아우라를‘지향’하는 것이 서울이 가진 특징이다.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화’를 기반인 일본과는 이런 면에서 다르다. 서울은 도쿄와 교토처럼 경직된 면을 공간에 품고 있지 않다. 이는 한양에서부터 시작한 도시기획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 ‘길’은 도시체계를 만드는 기준이었다. 경복궁에서 보신각까지 이어지는 육조거리. [세종로] 서대문과 동대문을 잇는 운종가[종로]. 종각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큰 골목. [광교 애 서 신세계백화점 본점까지] 한양에서 ‘길’은 각 동네를 연결하는 유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북촌은 그 당시 권문세가가 살던 지역이었다. 종각 남쪽은 권문세가 외 가문들이 살던 지역. 운종가와 청계천은 중인들이 살았다. 육조는 관가 자리였다.
조선이 대한제국이 바뀌기 전, 고종은 한양에 대한 새로운 도시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 계획도 사라졌다. 그 대신 일본이 주도하는 도시기획으로 바뀌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북촌은 권세가들의 저택에서 대규모 한옥주택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경성에서 서울로 바뀐 이후 도시계획은 다시 바뀌었다.
강남지역은 조금 다르다. 강남지역은 큰 빌딩과 그 뒤로 작은 건물들이 한 박스로 만들어진 형태로 공간이 만들어졌다. 오랜 시간 그곳에 살아간 사람들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강북. 이와 달리, 강남은 철저하게 도시계획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강남이 강북보다 깔끔한 건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 하지만 강남은 강북이 가진 유연함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공간구획은 깔끔하지만 지역에서 개성이 드러나기 어렵다. 강남 도심은 대체로 그렇다. 그렇기에 빌딩에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가로수길 같은 곳이 주목받는 게 당연하다.
한 도시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도시 모양. 주변 공간이 가진 성격은 당연히 브랜드가 만든 공간에 영향을 준다. 애플 가로수길점을 생각해보자. 큰길에서 갑자기 작은 가로수길로 이어진다. 애플이라는 브랜드 파워 덕에 애플스토어는 강렬함을 선보인다. 애플스토어에서 ‘오호! 애플이다!’라는 건 가로수길 이주는 공간감이 아니다. 애플이 가진 브랜드 파워다. 오히려 그 주변은 뭔가 비어있다. 특이한 모양을 자랑하는 가로 골목도 애플스토어에 비하면 아우라가 약하다. 애플스토어 다음으로 가로수길에서 브랜드 파워가 공간이 미치는 영향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은 카페 키츠네 서울이다.
오모테산도에 위치한 카페 키츠네는 오모테산도라는 공간에 잘 스며들어가 있다. 이와 다르게 카페 키츠네 가로수길은 큰길과 작은 길 사이에서 애매한 경계에 있다. 도산대로의 고층빌딩에서 좁은 길로 갑자기 내려가는 가로수길은 고층빌딩에 ‘압도당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나 애플스토어, 카페 키츠네는 주변과 최대한 조화를 맞추면서 충분히 자신만의 결을 유지한다. 또한 카페 키츠네는 짧지만 좁은 길을 한번 더 들어가기에 공간의 몰입도가 올라간다. 애플스토어는 ‘애플’이라는 매우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있다. 도쿄와 교토가 다르듯이, 서울에서는 강북과 강남이 다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미학도 다르다. 일본 관점을 한국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특정 기준이 강해지는 경우 언제나 편차가 생긴다.
그렇다면 제주도는 어떨까? 제주도는 외부과 내부로 완전히 나눠진 공간이다.‘이름’처럼 제주도는 섬이다. 배와 비행기로만 제주도에 갈 수 있다. 제주도는 단절과 이음을 모두 가진 공간이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은 브랜드로 하여금 도시와는 다른 새로운 ‘표현’이 가능케 만든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이 교외로 나가 새로운 그림 소재를 개척하듯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주도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가치. 사람이 추구하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실용적’으로 묘사하는 브랜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는 매우 좋은 공간이다. 내가 제주도를 서울 다음으로 고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브랜드에는 인간 생존, 욕망, 갈등이 고스란히 버무려져 있다. 인간이 만든 온갖 노력, 즐거움, 기쁨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것이 브랜드다. 취향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많은 도전과 좌절. 희망과 좌절이 브랜드 안에 모두 담겨 있다. 브랜드는 화려한 성공만이 있는 게 아니다. 처참한 실패도 가득하다. 복잡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브랜드를 만든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을 담아 브랜드를 만든다. 꿈으로 브랜드를 세우고, 수많은 문제를 시행착오로 해결하면서 브랜드가 꿈꾸는 미래를 그려나간다.
사람은 브랜드를 만들었다. 브랜드는 사람을 만든다. 브랜드가 만든 숲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사람과 브랜드는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도시를 만든다. 그렇기에 브랜드를 읽으면 인간이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을 엮는 매개체가 브랜드다. 그 규모가 커지면 도시로 발전한다. 도시가 브랜드가 된다는 말은 도시의 감각이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브랜드는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브랜드를 만든다. 브랜드는 브랜드 전문가 같은 전문가만이 만든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내가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브랜드를 만든다. 사람들은 브랜드를 통해 나를 발현하며 남과 나를 이어간다. 브랜드는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무한한 매력을 전한다
나를 제주도에 가게 만든 건 만든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가게일 때문에 방문했던 도쿄. 도쿄에서 본 츠타야, 소니, 테노하, 제니스 웡, 블루보틀이 만든 공간에서 느낀 호기심. 그 호기심이 나를 제주도로 이끌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 당시를 생각해본다면 내가 발견한 모습은 브랜드가 사람과 소통하는 모든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