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꼭 이렇게 살아야 해?
다재다능하다는 것은 축복일까? 그런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뭘 해도 꽤나 잘하는 사람들. 그냥 쓰윽 보고는 “이런 건가?”라는 혼잣말을 무심하게 내뱉고 파바박 해버리는데 결과물의 퀄리티도 좋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나도 나름 센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일머리는 썩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뭘 해도 느려터진 손에, 전반적인 흐름과 구조가 이해되지 않으면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하는 편이라서 준비하는데만 한 세월이 걸린다. 이게 분석적인 거라면 분석적인 것이겠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어서일까. 내가 직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나의 단점들만 자꾸 부각되니 잘 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도 있었다. 거기다가 평생 일할 수 있게 해 줄 쓸만한 기술이라는 게 도대체가 무엇인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뭘 하든 퇴직하면 끝이고, 퇴직금으로 치킨을 튀겨보려고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게 나의 천직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 평생 해볼 수 있는 일이 뭘까?라는 질문에 내가 내린 답은 부동산 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투자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꾸준히 하면 적어도 중간 이상은 할 수 있겠지 라는 막연하고도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과의 시간이 부족해졌다. 내가 모르는 사진들이 생기고, 내가 없는 여행을 간다. 조금씩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로 등을 대고 한 걸음씩 걸어 나가니 내 생각보다 멀어지는 속도는 2배나 빠른 셈이었다. 나는 불안 불안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고,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그 줄은 너무 단숨에 툭 하고 끊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내가 100억 부자가 된다면 50억짜리 위자료를 벌고 있는 건가?
문득 내 인생이 흐릿해졌다. 이게 맞는 것인가. 또다시 의문이 다가온다. 3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가족에게도 버티기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몇 년을 더 하면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지쳐만 갔다. 지쳐갈수록 서로 대화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차피 서로 의견이 통하지 않을 것이니 설득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부딪힘을 줄이는 것이 심적으로 더 편하니까.
투자자로 투자만 밀도 있게 챙기는 3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것이 극에 다다랐다. 집안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나도 이제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 ‘3개월 동안 못 챙겼던 것들을 하나둘씩 챙겨보자.’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일단 지금은 가족에게 집중해 보자. 열심히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모처럼 아이와 단둘이 놀러 가던 날이었다. 운전 중이었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아빠는 회사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 건지,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불안해졌다. 다시 학교 생활이 힘든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되물어봤더니 아이의 대답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럼 많은 꿈을 꿀 수 있잖아.”
꿈이라…. 좋은 말이다. 어느샌가 ‘돈 = 꿈’이라는 절대적인 명제가 내 안에 생겨버렸던 걸까? 많은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단 하나의 꿈이 아니라 많은 꿈이라니. 내 인생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 내가 조금 우스워졌다. 늘 정답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 와중에 아이가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포기해 버렸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고,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아졌고, 그러기엔 다른 것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러기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내가 잘하는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만큼 나는 이렇게 자기 합리화도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 최악의 하루가 다가왔다. 2024년 3월 30일. 아내가 말한다.
“이제 그만하자.”